“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0-11)
긴 여정 끝에 발견한 유다인의 임금,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뵙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연약한 아기의 모습 앞에서 경탄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시기, 함께 구유를 경배하는 우리도 경탄에 빠진다.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처럼 연약한 아기 모습으로 오셨을까. 어떻게 이렇게 누추한 구유에 오셨을까.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리고 묻는다. 어떻게 이처럼 작고 연약한 아기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을까?
2024년 성탄절, 수원 신학교에서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위한 ‘WYD 십자가’를 모시고 수원교구 청년들과 성탄 밤미사를 봉헌했다. 작디작은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옆에 세워진 크고 높은 십자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십자가와 구유. 그런데 실은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예수님 탄생의 신비를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묵상해왔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안에 담긴 희망의 표지가 십자가를 통해 더 밝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희망으로 매일을 산다. 그러나 인간적 희망은 언젠가 스러지기 마련이다. 희망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지만, 영원한 희망이 아니기에 우리는 ‘희망의 고문’으로 늘 괴로워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하지 않는, 영원히 기댈 수 있는 희망을 찾는다.
우리도 여느 사람처럼 언젠가는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희망의 절벽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물을 것이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답은 바로 구유와 십자가일 것이다. 빈 구유에서 빈 무덤까지 함께 걸으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고, 희망의 불꽃을 새롭게 지피실 것이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연약한 인간의 모든 것을 당신 것으로 감싸 안으신 분. 그 사랑은 동정녀의 태 속에 잉태되시어 미혼모로 오인되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쓴 사랑이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어 학살의 위협을 무릅쓴 사랑이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감싸 안으며 그들의 마음속 깊은 상처와 고뇌, 고통과 번민까지 끌어안은 사랑이다.
그들에게 하느님 자녀의 고귀함과 존엄함을 일깨우고 돌보아준 사랑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죽음 앞의 번민까지 끌어안으시며 모욕과 조롱, 비방과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상처와 피로 범벅된 몸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인간의 존엄을 박탈당한 채 모든 이로부터 잊히고 버림받은 인간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신, 마지막 숨을 내쉬시며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인간의 죽음까지 감싸 안은 사랑이다.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기에 걸어야 할 그 모든 고통의 길을 몸소 걸으심으로써,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보다 먼저 가시어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며 동행하려 한 사랑이다. 심지어 죽음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확신시키기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사랑이다. 그렇게 우리와 하나 되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는 불멸의 사랑이기에,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우리는 빈 구유에서 시작하여 동방의 박사들과 함께 구유 앞에 모여 희망을 노래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을 향한 빈 구유의 기다림이며, 빈 무덤을 뒤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동행 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향해 희망을 말할 수 있다.
한민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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