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독서가 떠오른다. 왜 독서의 계절일까? 농경 문화의 관습에서 나온 사자성어 등화가친(燈火可親)에서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여름에는 등불을 켜고 책을 읽기엔 덥지만, 선선한 가을은 등불을 가까이해 책을 읽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래도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고대 중국에선 종이 대신 죽간(竹簡)을 사용했는데, 봄에 심은 죽순은 가을까지 키워야 제본할 수 있었다. 가을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아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열매나 잎사귀가 떨어지는 조락(凋落)의 계절. 가을엔 차분함과 외로움이 깊어진다.
나와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한 계절이다. 외로움을 달래줄 가족과 친구, 연인을 찾는다. 짧은 만남 뒤 또다시 허탈함과 공허함이 밀려온다. 여기 나의 곁에서 오래 함께할 ‘그 누구’는 없을까? 피로와 분노, 낙담과 실패의 순간에 누가 나를 품고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있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도만으로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할 때 ‘좋은 책’이 난관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독서가 인격 성장을 방해하는 강박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함몰되지 않도록 새로운 내면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교황은 독서광으로 소설과 시를 즐겨 읽는다. 책상과 가방에는 성경 외에 늘 한 권의 책이 있다. 강론과 서한에는 성경 구절과 함께 전 세계 유명 작가와 무명 작가의 작품이 늘 인용된다. 교황은 신학교의 사제 양성 과정에서 문학을 부차적인 학문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미래 사제들이 문학을 통해 인류 문화와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다가서지 않으면 지적·영적 빈곤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교황이 가장 사랑하는 문학 장르는 디스토피아 즉 ‘비극’이다. 교황은 1964년 아르헨티나 산타페의 임마꿀라따 대학(예수회)에서 2년간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쳤다. 교황은 최근 신학생과 사목 일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학생들에게 중세 스페인 장군 엘 시드(El Cid)를 가르쳐야 했지만, 학생들이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비극 작품을 많이 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의 작품을 읽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엘 시드’는 집에서 읽어오도록 했고 수업 시간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수업했다고 회상했다.
비극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교황은 “우리 모두 그들의 비극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우리 자신의 드라마를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등장인물의 운명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허함과 결핍, 외로움에 대한 눈물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독서는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줄까?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어휘력을 향상하고 지적 능력을 개발하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집중력을 향상하고 인지기능 저하를 예방하며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여준다.” 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공감 능력을 키우며 가장 외로운 사람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교황은 문학이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도와준다고 조언한다. 세상 속에서 숨 가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시각은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목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또 전례·사목·자선 활동 등 봉사도 의무적인 일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 작품이 세상을 식별하는 훈련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단함에 지친 심신에 가을이 주는 쓸쓸함이 조용히 다가온다. 갑자기 떠오르는 성경 구절을 되뇌며 책 한 권을 고른다. 조용한 공간에서 천천히 읽는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관상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고 타인과 세상을 비춰보자. 메마르고 고단한 내 마음을 지켜줄 새로운 ‘오아시스’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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