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가 없다고만 하지 말고 찾아봐. 그러면 찾아진다.” 연구소 소장을 지내신 고 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의 말씀입니다. 정말로 찾는 노력을 하다 보면 무대 뒤에서 등장할 순간을 기다리던 배우처럼 중요한 자료가 성큼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 관련 자료를 수집해왔고 자료를 기반으로 연구 성과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연구소는 교회사 자료가 필요한 본당이나 방송·신문사·박물관 등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성심성의껏 자료를 찾아드립니다. 드라마·영화를 찍거나 소설을 쓰겠다는 분들, 순교 성인화를 그리겠다는 분들의 경우 시대적 배경이나 작품의 모티프 혹은 영감을 얻기 위해 연구소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60년 동안 자료를 수집했으나 그럼에도 또 자료를 찾으러 갑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자료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갈 때는 그 목적에 맞는 자료만 보입니다. 원하는 것을 찾겠다는 열망 때문에 눈이 가려져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상치 않게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원하는 자료를 찾거나 못 찾거나입니다.
두 번째는 예전 신부님들이 복사해온 자료들은 지금 보면 많이 모자랍니다. 흑백 복사라 판독이 어렵고 사진으로 촬영해온 것은 화소 수가 낮아 전시나 출판 등에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소장처를 찾아가 재촬영하거나 고용량 파일을 구입합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페낭 신학교는 1855~1892년 총 24명의 조선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러 갔던 곳입니다. 페낭 신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성적 기록부·학생 등록부·학교 회의록·세례·견진·사망 명부 등에는 조선 신학생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855년 6월 도착해 1862년 2월 페낭을 떠난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에 대해선 “학업 성적은 중간 정도이며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품행이 바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1884년 12월 도착한 김 토마스와 홍병철 루카가 1885년 7월 말라카교구장 가스니에 주교에게 페낭 신학교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학교 회의록에는 1883~1888년 페낭 신학교 교수로 있던 빌렘 신부가 작성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 외에 코스트 신부가 페낭 신학교 교장 발레 신부에게 쓴 편지도 있습니다. “그들은 풋풋하고 앞날이 창창한 모습으로 우리를 떠났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신학교의 동료 신부님들이 헌신적으로 돌봄으로써 신부님께서 아버지처럼 이끌어 주신다면 그들은 굳세고 결단력 있게 자신의 성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페낭 신학교 자료 중 일부는 조각조각 부서져 페이지를 연결해서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그 자료들을 남겨두고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아픈 것은 다음 세대는 이 자료를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해외에 있는 한국 교회 유산을 살피고 보존처리가 필요한 경우 기꺼이 교회 공동체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사람처럼 자료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걷는 ‘세상의 길’을 주님께서 분명히 동반해주신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기에 제 기도를 분향처럼 올립니다. “하느님, 어떻게 좀 해주세요.”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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