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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세 성인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소바나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로마로 가 삼촌이 아빠스로 있던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라테라노 학교에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오 6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비서가 됐습니다.
이후 그레고리오 7세는 1046년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3세 황제에 의해 그레고리오 6세가 폐위됐을 때, 독일 쾰른으로 갔다가 이듬해 교황이 선종하자 오딜로 성인이 지도하던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1049년 프랑스 툴의 주교인 브루노가 성 레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다시 교황의 불림을 받고 로마에서 차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차부제는 부제 밑의 성품성사를 받은 사람을 일컫는데, 서방 교회에서는 차부제가 대품으로 여겨진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재정과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원 개혁을 담당한 그레고리오 7세는 1054년 상스 교회회의를 주재하며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각각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실체변화를 인정하지 않은 베렌가리우스주의를 단죄했습니다. 니콜라오 2세 교황 때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를 맡아 일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1073년 4월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이 선종하자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교황으로 선출됐습니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에 즉위하며 전임 교황들을 도와 자신이 추진했던 교회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 밀라노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자 생활을 쇄신하고자 했습니다. 1075년에는 전년도에 열린 로마 교회회의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했습니다.
또 1075년 3월 공포한 교황령에서 교회와 교황이 국가와 국왕보다 우선한다고 천명해 교황만이 온전히 주교 서임권을 갖고,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국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대립을 가져왔습니다.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에 저항해 공석인 밀라노 주교를 임명하고, 제국 내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을 행사하며 교황과 충돌했습니다. 교황의 강력한 경고와 지지를 얻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이탈리아 카노사로 내려와 참회복을 입고 교황으로부터 파문 해제를 간청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재임하던 중에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는 교회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동방교회와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하인리히 4세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까지 피신했다가 1085년 선종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1583년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1606년 바오로 5세 교황 때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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