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의 피를 산 사람에게 - 혈액은행의 원조 소련저자 : 이재담
지난 1921년의 어느 날, 런던 적십자사에 근무하던 퍼시 올리버는 출혈이 심한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세 사람의 동료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현장에서 시행한 혈액형 검사에서 그 중 한 명이 적합한 것으로 나타나 수혈이 가능했고 그 결과 환자는 목숨을 건졌다. 이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올리버는 지원자들을 모아 혈액을 제공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20명으로 출발한 그의 조직은 1930년까지 2,500여명의 지원자 연락망을 갖추게 되었고 매년 수 백명의 인명을 구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최초의 공혈체계는 세계 각국의 모범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소련 등이 이 방식을 도입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1930년 3월의 어느 날 밤, 모스크바 스킬호소프스키 병원의 응급실에 손목을 칼로 베어 자살을 기도한 한 젊은 엔지니어가 실려 왔다. 환자는 맥박이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즉시 대량의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등록된 공혈자들을 소집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수혈 담당의사 세르게이 유딘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사체의 혈액을 수혈하려는 것이었다.
원래 최초로 사체의 혈액을 수혈에 이용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수혈연구소의 V. N. 샤모프였다. 1927년 부터 개로 실험을 거듭한 그는 사후 10시간 동안 혈액의 기능이 유지되며 수혈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영국의 의학 잡지 ‘란셋’에 발표했었다. 유딘은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고, 사람에서는 아직 아무도 이런 수혈을 시도한 바 없었다.
유딘은 옆방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6시간 전에 버스에 치어 사망한 60세 된 노인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다행히 이 노인의 혈액형은 환자와 같았다. 유딘은 사체의 복강을 절개하고 하대정맥에 주사바늘을 꽂아 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혈액을 채취했다. 응급실로 급히 돌아간 그는 동공반사가 희미하고 맥박이 만져지지 않는 환자의 팔에 이 혈액을 주사했다. 250밀리리터를 주사하자 맥박이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150밀리리터를 더 주사하자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했고 곧 이어 의식이 돌아왔다. 나머지 수혈이 끝날 즈음에는 맥박이 확실히 만져지고 얼굴색도 좋아졌다.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다. 환자는 이틀 후 퇴원했다.
그 후 모스크바의 앰뷸런스들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체를 유딘의 병원에 집중적으로 실어 날랐다. 주로 급사한 사람들의 혈액이 채취되어 보관되었고, 혈액형과 매독 검사를 시행한 다음 사체를 해부하여 다른 병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체 혈액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의사들은 이제 생체 혈액의 보존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사체의 혈액을 보존할 수 있다면 생체의 혈액도 보관할 수 있을 터였다. 최초의 사체혈액 수혈로부터 수 년 후, 소련의 의사들은 미량의 구연산을 첨가하면 혈액이 응고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혈액의 보존에 도입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소련 각지에는 60개 이상의 혈액 보존 시설이 설립되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고 세계는 이를 뒤따랐다.
한편, 혈액보존에 관한 소련의 문헌들을 접한 시카고 쿡카운티 병원의 버나드 판터스는 1937년에 공혈자의 혈액을 소량의 구연산이 든 용기에 밀폐하여 냉장고에 보존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는 이를 혈액보존실험실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좀 더 부르기 쉬운 이름을 생각해냈다. ‘혈액은행’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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