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살다보면

[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32)때로는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자.

참 빛 사랑 2018. 9. 17. 17:41




가끔 눈빛만 주고받던 S수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평온하고 친절한 그의 모습이 매우 좋았고 존경스러웠다. 그러다 함께 살 기회가 생겼다. 기대가 큰 탓이었을까. 막상 함께 살다 보니 불편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매몰차게 거절할 때나 웃으면서 상대방의 결점을 지적할 때 ‘아, 사람은 함께 살아봐야 알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차츰 그를 향한 존경심이 사라졌다.

함께 사는 사람을 존경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다. 내가 강의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존경스러워요”, “열정적이에요”, “밝아서 좋아요” 하지만 나는 늘 강의할 때처럼 열정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다. 함께 살았던 한 수녀는 나에게 “수녀님, 알고 보니 헛똑똑이군요”라며 놀려댔다. 나를 정확하고 예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수도 하고 남들 다 아는 이야기도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성인(聖人)과 한집에 살기 어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있거나, 역할이 달라 거리가 유지되는 사람은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늘 함께 먹고 자고, 일을 같이하면 ‘거리’가 없어진다. 거리가 없어지면 ‘정’은 있어도 ‘존경’하기는 어렵다. 군대 간 아들도 멀리 떨어져 봐야 ‘부모님’께 존경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쓴다. 나 역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부모님의 살아온 흔적을 더듬어보고 존경심이 마음 깊이 우러나왔다. 멀리 떨어진 뒤에야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 같다.

요즘은 디지털 정보로 인해 공사가 뒤섞이면서 거리감이 없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삼는다. 언젠가 지인들과 담소를 나눴다. 그러다가 누군가 “○○○가 김치만두를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정말 먹고 싶어지더라고요”, “걔가 몇 살이더라”, “아마 걔가 50대 초반” 그러면서 결혼을 했느니 이혼을 했느니 하면서 대화했다. 평소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나는 ‘걔’가 그들의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예인이었다. 언니나 동생과 이야기할 때도 앞뒤 설명 없이 ‘걔’가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 일과 텔레비전 속 인물의 이야기가 뒤섞여서 혼란스럽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낯선 사람도 한순간에 친한 이웃이 된다.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천사가 돼 잡담과 험담으로 흘러간다. 디지털 정보는 낯선 사람을 우리의 사적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지만 예우를 하지 않는 ‘걔’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하셨다. 마찬가지로 빠르고 쉽게 소통하는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을 사람이다. 유럽이나 미국 그리고 한국의 고향도 모두 같다. 그래서일까.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종종 ‘걔’로 등장한다.

조금은 떨어져서 디지털 정보를 받아들이면 어떨까. 나무나 꽃도 잘 자라기 위해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고속도로에서는 안전운전을 위해 차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가 존경하는 마음을 만든다.



성찰하기



1 한 발짝 뒤에 떨어져서 봐요. 사랑하는 사람과도 약간의 ‘공적 거리’가 필요해요.

2 유명인에 대한 잡담이나 가십이 습관이 되면 나의 영혼에도 독이 돼요.

3 조금 떨어진 시선으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아름다운 거리감을 만들어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