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내전 ‘비극의 땅’ 발칸을 가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됐던 라틴 다리 앞 사라예보 박물관 외벽 사진전시공간에서 통역을 맡은 남기옥 박사가 정세덕 신부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4월, ‘유럽의 화약고’ 발칸으로 떠났다. 가톨릭과 정교회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패권을 놓고 각축하면서 문명의 충돌이 벌어진 비극의 땅 ‘발칸’을 둘러보고 평화를 새기기 위해서였다.
특히 오는 8월 20일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세덕 신부)가 주최하는 ‘2016 평화의 바람 한반도 평화 나눔 포럼’에 주제 발표자로 초청된 발칸반도 내전 국가들의 가톨릭 주교단을 예방하고, 사전에 현지를 답사한다는 취지도 있었다. 이를 위해 20세기 말 가장 잔혹한 전쟁을 겪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두 얼굴이 교차하는 세르비아, 독립 당시 ‘10일 전쟁’을 겪은 슬로베니아 등지를 돌아봤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공동으로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창립 28주년 특집 르포 ‘세계의 화약고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를 기획, 발칸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 온 현지 지역 교회 신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장 취재를 통해 내전의 눈물과 상처, 그 속에서 피어난 평화와 희망을 7회 걸쳐 살핀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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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예보는 뜻밖에 아주 밝아 보였다. 구 시가지 페르하디야 거리를 걷는 청춘은 활기에 차 있고, 노천카페의 노인들은 커피 한 잔에 시름을 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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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에서 1995년까지 4년간 이뤄진 사라예보 봉쇄 때 남은 총알탄 탄피로 만든 열쇠고리. 아래 쟁반에는 탄피로 만든 볼펜과 비행기 모형이 보인다. |
발칸으로 가는 길은 멀다. 일행은 인천에서 로마를 거쳐 베오그라드를 경유, 사라예보 공항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처럼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내전을 겪은 발칸반도는 정서적으로 우리 한반도와 굉장히 가깝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 세력이 맞부딪히는 요충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열강의 침탈과 점령, 수탈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민족주의로 무장해 독립을 쟁취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상징되는 발칸반도가 그리스도교 문명권과 이슬람 세력의 각축장이었다면, ‘냉전의 화약고’였던 한반도는 이념 분쟁으로 민족상잔을 겪은 비극의 땅이었다. 발칸이 두 차례 지역 전쟁과 세계대전을 겪은 뒤 공산주의체제 아래에 있다가 1990년 이후 10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국경을 맞댄 채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한반도 역시 1953년 정전 이후 63년째 국제법상 휴전 상태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력의 각축장
영어 사전에 보면, ‘발카나이즈’(Balkanize)라는 단어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칸의 여러 나라처럼 서로 적대시하는 작은 나라로 분할됐다는 뜻이다. 단어만 들어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듯이, 발칸반도에서 따온 말이다.
발칸의 비극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오스만튀르크(터키)와 연합해 대응하면서 비롯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과 타 슬라브인들은 러시아의 지원 아래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지만(1912년 1차 발칸전쟁), 다시 자신들 간에 영토 분쟁이 벌어진다(1913년 2차 발칸전쟁). 승리한 세르비아는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견제로 실패하고, 세르비아계 비밀 결사 흑수단 단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를 암살하면서 전 유럽은 전쟁에 휘말린다.
전쟁의 참화는 사라예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보스나 강 지류 밀야츠카 하천 ‘라틴 다리’에서 시작됐다. 길이 39m에 폭 4.3m의 작은 다리 하나가 인류 역사의 획을 바꿔놓았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당한 다리 건너 은행이 있던 자리에는 세르비아의 혁명 영웅을 기리는 박물관이 들어섰고, 그 건물 외벽엔 관련 사진들이 유리 안에 전시돼 있다. 당시 정황을 담은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그에 5년 앞서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떠올랐다. 외세의 침탈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고자 총을 든 두 청년의 모습이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34개국이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갈려 4년 전쟁 동안 전사자 900만 명, 부상자 22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1000만 명을 내고서야 마무리됐다. 세르비아는 전쟁에서 졌지만 1918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종전 직전 14개 조항의 평화 원칙을 제시하면서 발칸은 독립을 보장받았고, 발칸 역사상 최초의 단일국 유고슬라비아(‘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가 건국된다.
독립의 물결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다시 좌절을 맛본다. 발칸은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복잡했기 때문이다. 발칸은 나치에 유린당했고, 당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우스타샤(Ustasa)에 의해 자행된 세르비아인 35만 명에 대한 인종 청소는 훗날 비극을 잉태했다. 민족 간 갈등은 크로아티아 출신 요시프 티토에 의해 잠잠해졌고,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나서야 무너진다.
갈등은 1990년 1월 제14차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대회에서 유고 해체가 선포되면서 터져 나온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신유고연방과 다른 민족주의 세력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맨 먼저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크로아티아와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도 이를 뒤따른다. 첫 연방 탈퇴국인 슬로베니아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제재를 받은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의 연방 탈퇴에 또다시 무력을 사용했다. 이것이 1992∼1995년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이다.
인종 청소, 잔혹함의 정점에 치달아
내전은 특히 ‘인종 청소’로 잔악의 정점을 이뤘다. 보스니아군은 결사 방어로 수도 사라예보를 지켰지만, 신유고연방군은 단숨에 국토의 70%를 점령하고 학살을 저질렀다. 1995년 스레브레니차 무슬림 학살로 잔악성은 극에 달했다. 당시 4년 가까이 봉쇄된 사라예보는 지금도 그때의 총탄 흔적은 물론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 공간이 시내 곳곳에 남아 있을 정도다. 내전의 사망ㆍ실종자는 35만 명, 난민도 200만 명을 헤아린다. 1995년 미국 주도로 테이튼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식됐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20년을 넘긴 지난 3월에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인종 청소를 주도한 세르비아계 출신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71)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40년 형을 선고했지만 때는 늦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발칸은 다시 전쟁의 늪에 빠졌다. 1998년 코소보 사태다. 알바니아계가 90%에 가까운 신유고연방 자치주 코소보는 14세기 세르비아왕국의 발상지여서 세르비아와 코소보해방군(UCK)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이듬해 6월 분쟁은 종결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 10년 전쟁’이 종식되기에 이른다.
같은 남슬라브족 끼리, 언어도 아주 유사한, 생김새도 매우 비슷해 구별하기도 어려운 이들이 왜 인종 청소라는 말하기조차 역겨운 잔혹한 전쟁을 벌였는가, 하는 의문을 안고 들어간 사라예보의 밤이 무슬림의 하루 5번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련한 아잔(adhan) 소리와 함께 깊어간다. 창가에는 아름다운 모스크가 환한 달빛 아래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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