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년전 잭 캔필드의 「Chicken Soup for the Father''s Soul」 (HCI, 2001.5)을 읽고 어떤 가족의 장기 기증 이야기가 감명 깊게 다가왔다. 15살 여자 아이가 처음 마주친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병원에 연락하여 어머니의 안구를 기증하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온전한 몸으로 왔기에 그곳을 떠나갈 때도 온전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죽음을 맞은 어머니의 몸이 아버지가 허락하여 의사들에 의해 훼손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슬픔을 더욱 가중시켰는데 아버지의 설득으로 장례를 치른 후 주인공인 딸은 설명을 듣는다. ‘얘야, 이 세상을 어둡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안구 기증으로 어떤 시각장애인이 세상을 보게 된다면 어머니의 삶은 그를 통해 이어지는 것이고 그에게 새 삶을 살게 하는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 되는지. 엄마와 아빠는 이미 오래전 안구를 기증하기로 결정하고 살아왔다’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주인공은 성장하여 결혼했고 딸아이를 낳았다. 그가 자라나서 주인공이 엄마의 죽음을 경험했던 나이가 되었을 때다. 그 아이도 주인공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로부터 장기 기증에 대한 얘기를 듣고 기꺼이 안구를 기증하겠다고 결심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주인공은 그런 딸의 행동이 매우 대견스러웠다. 그 후 주인공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안구가 기증되었다. 그런데 2주 후 딸아이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그의 안구도 어느 병원에 기증된다. 엄청난 슬픔을 견디고 있는 주인공에게 몇 주 후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어떤 이에게 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곧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주인공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딸의 눈을 통해 어떤 사람이 세상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서.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두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이처럼 대단한 일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시각장애인의 생활이 얼마나 깜깜하고 답답할까 생각해봤다.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봉천동 실로암 복지관을 찾아 인도 교육을 처음 받았고 교육 담당자의 안내 하에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갔다 돌아오게 되었다. 눈을 감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전철을 승하차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앞을 못 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되었다.
한 주 후 첫 외출도우미로 나서서 봉천동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홍대 역 부근까지 안내를 해주게 되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시각장애인을 만나 나를 소개하고 처음이니 혹시 잘못이 있더라도 양해해 달라고 했다. 한쪽 팔을 내주자 이를 잡고 따라온다. 복지관을 나와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 표를 구하고 기다리다가 전철에 탔다. 교통 약자석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순간 사람들은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각장애인의 말에 따라 홍대 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 횡단보도를 건넌 후, 골목을 돌고 돌아 오피스텔 빌딩 앞에 섰다. 신기하게도 그는 중요한 참조물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앞에 무슨 건물이 있고 어디서 오른쪽으로 돌지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더듬어 확인한 후 집어 들곤 이제부터는 혼자서도 갈 수 있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채 난간을 잡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함께 전철을 타고 오는 동안 그는 예산의 어느 식물원에 다녀오는 길이며,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고 했다. 손수건에 꽃 물감을 들였다며 꺼내 보여주고 예쁘게 물이 들여졌는지 묻기도 했다. 전철이 당산철교 위로 한강을 건널 때는 그 옆에 선유도 공원이 있는데 참 좋다며 한 번 가보라고도 했다. 시각장애인은 눈 대신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 생각났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나의 시각장애인 외출도우미 자원봉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번은 봉천동 복지관에서 동빙고동까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탔고 한참 골목길을 헤매 가며 안내했다. 또 한 번은 시각장애인 집에 직접 찾아가 근처의 농협과 시장으로 안내했다. 농협에선 그가 입출금 내역을 통장에서 확인할 수 없기에 내가 읽어서 알려 주어야 했다. 그러면서 참 많은 것을 깨달아 나갔다.
현대인은 소음 속에 파묻혀 산다. 집에 있든, 길을 가든, 회사에 있든 주변에 많은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굳이 자신이 만들어 내거나 원인이 되지 않은 소리가 대부분이다. 보도를 걷고 있노라면 버스, 자동차, 냉난방 실외기 등등에서 내뱉는 소음들이 아무 거름막 없이 청신경에 도달한다. 더구나 지하철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나 지하철 탑승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분주하게 갈 길을 찾아 움직이기에 시각과 청각을 곤두세워야 충돌을 피하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한눈을 팔다가는 누구와 부딪힐지 모른다. 그야말로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인가 “딱딱딱...딱딱딱...” 가볍지만 강도 높은 소리가 들린다. 다른 소음에 묻힌 탓도 있겠지만 그 분명한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데 한눈을 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쁜 걸음 속에서 딴데 신경 쓰거나 멈춘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간다.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전부이며 주위의 소리나 환경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차례 경험해 본 나는 안다. 누군가 자기가 가고 있음을 타인에게 알리는 소리이자 나아갈 방향을 찾느라 바닥에 깔린 시각장애인 안내용 점형 또는 선형 블록을 두드리는 소리다. 때로는 길을 찾아 헤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느 날 먼 곳에 지인이 하는 치과를 가던 중 막 지하 광장을 지나며 출구를 향했을 때였다. “딱딱딱...딱딱딱...” 익히 알고 있는 소리라 ‘누군가 용케도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직감적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한 남자가 하얀 지팡이로 바닥을 열심히 두들기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걸어가지 못한 채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에 쫓겼지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도와 드릴까요?” “네 도와주세요.” “어디로 가시는 중이예요.” “등촌 역이요.”
팔을 내어주자 그는 정말 감사하다는 듯이 내 팔을 잡고 따라왔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할 때는 자기가 두 번 카드를 찍겠다면서 서슴없이 찍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승강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어쩌다 길을 잃었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신기하게도 길을 잘 찾아가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과 달리 모든 길을 외우고 있으며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간다. 그는 대방동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여의도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등촌역에서 내려 그 부근 복지관을 다닌단다. 하지만 오늘은 여의도역을 지나쳐 다시 돌아와 반대편에 내렸다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일반인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앞을 못 본다면? 어찌어찌 지하 광장까지는 내려왔는데 거기서 스스로 개찰구를 찾아 5호선을 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것. 함께 등촌역 방향의 승강장에 도착하자 그는 미안해하며 이제부터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굳이 3-2호 탑승위치까지 인도하고 확인해보라고 하니까 도어에 표시된 점자를 만져보고는 맞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탑승 위치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등촌역에 내렸을 때 기억 속의 정렬된 방향을 따라 원하는 출구로 나가 복지관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버스에서 내리는 위치도 중요했는데 이를 놓쳐 헤매게 되었던 것이다.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그를 남겨두고 나는 자리를 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급하게 치과로 향했다. 점심을 못 먹었지만 왠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는 흰색인데 이는 전세계 공통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처음으로 공식 채택하였고 점차 영국, 캐나다, 미국 등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벼운 흰색 지팡이를 앞으로 뻗어 바닥을 두드리거나 좌우로 짚으며 손과 귀를 통해 주변을 탐색해 나간다. 또한 이를 들고 있으면 시각장애인임을 알아달라는 의미다. 혼자 갈 때는 열심히 그 지팡이로 길바닥의 안내용 점자 블록을 두드리며 나아가고, 방향을 바꾸거나 계단이나 장애물을 식별한다. 하지만 안내받을 때는 안내자의 팔을 잡고 지팡이는 들게 된다.
혼자 전철을 타려고 기다리거나 탑승 후 창가 쪽에 서 있을 때도 그냥 지팡이를 들고 있다. 누군가가 흰 지팡이를 들고 있다면 시각장애인으로 인식하고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출근 시간대의 여의도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북적인다. 어깨끼리 부딪히거나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밟아도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오직 전진할 뿐이다. 휴대폰에 얼굴을 묻은 채 다리는 반사적으로 옮겨 놓는다.
그 한가운데 흰 지팡이로 딱딱딱 두드리며 조심스레 마주 오는 한 젊은 여성이 있었다. 시각 장애인이었다. 조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좀 도와드릴까요?’ 여쭈었다. 다행스럽게 ‘네.’ 하여 오른팔을 가까이 내미니 손을 대고 따라왔다. 9호선으로 환승하여 국회의사당역으로 가는데 환승게이트까지만 안내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혼잡한 시간에 환승해야 한다는 말에 내가 가야 할 방향과 반대이지만 그를 기준점, 즉 탑승 위치까지 안내하기로 했다. ‘앞에 계단입니다.’ ‘오른쪽으로 돕니다.’ ‘개찰구입니다.’ ‘3-1호차 탑승 위치입니다.’ 등등 일일이 설명해 주면 그녀는 흰 지팡이로 가끔씩 바닥을 가볍게 치며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면서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안양에서 1호선을 타고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한 후, 다시 여의도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고, 국회의사당역에서 하차하여 국회로 출근한단다. 그렇게 탑승 위치까지 안내한 후 개찰구를 빠져 나와 나의 목적지로 향했다. 그분이 날마다 안전하게 출퇴근하길 기원하면서.
현대인의 삶은 매우 분주하여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혼자만의 삶도 벅찬데 남에게 마음을 나눠줄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 지팡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저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한 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길을 찾고 있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각 길을 비켜주거나 안내해 주어야 한다. 바쁘더라도 작은 여유를 가지고 손길을 내어주면 큰 길잡이가 되는 엄청난 사랑의 실천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저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봉사할 기회가 저절로 찾아온다. 흰 지팡이가 되어 잠시 짧은 거리나마 도움이 되어 준다면, 딱딱딱...딱딱딱...소리에 귀기울여 시각장애인에게 안내자가 되어 준다면 마음은 흐뭇해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 이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각장애인은 모든 걸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또는 기억으로 대신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아주 예민한 소리에도 반응하고 기억 속에 세밀한 그림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을 안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다보면 남에게 조언하고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앞 못 보는 사람을 인도할 때는 더욱 세밀한 관심이 요구된다. 우선 전봇대나 행인과의 충돌 위험성, 계단을 헛디뎌 넘어질 우려, 길을 잘못 찾아갈 경우 등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반 발짝 앞서 걸으며 미리 앞을 내다보고 적시에 조언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들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순간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안내자에게 의지한다. 팔꿈치에 손을 대고 따라 오는데 이를 통해 전해지는 육감이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잠깐만 방심해도 그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누구든 일상에서 타인을 안내할 경우가 있다. 올바른 안내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과 준비와 행동이 필요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추가해서 느낀 점들이 더 있다. 시각 장애인은 시선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잘 모른다. 단지 소리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는 듯하다. 이는 안타깝지만 이렇게 되면 목표를 올바르게 지향할 수 없다. 초점을 잃은 시선은 참 당황스럽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선을 나아갈 방향에 두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라면 그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우리도 이처럼 목표를 잃고 헤매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삶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삶의 목표를 다시금 진지하게 짚어봐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또 하나, 시각장애인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 같다. 땅을 내려다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항상 고개를 들고 높은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어떤 외국 신부님이 강론에서 이 세상 눈앞의 이익과 먹이를 찾아 꿀꿀거리는 돼지가 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대부분이 자신의 시선을 하느님 나라에 두지 않고 그저 현세의 재물과 영예와 이익에 두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이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눈앞의 이익만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본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앞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것일까? 시각장애인이 한 발짝 앞도 못 내다보듯이 우리의 삶도 어쩌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건 아닌가? 내일은커녕 한 시간 뒤의 일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남의 것이고 미래는 신의 것이며 다만 현재가 나의 것이니 현재에 충실하라고. 미래가 신의 것이라는 말은 의미가 각별하다. 인간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 없을진데 누구의 안내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언제 넘어질지도 부딪힐지도 모른 채 더듬거리며 전진해야 하는가? 수없이 많은 장애물과 어둠과 두려움이 펼쳐져 있는 우리의 인생길을 아무 안내자나 인도자 없이 홀로 나아갈 것인가? 최소한 방향만이라도 알아야 할 텐데 이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쩌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시각장애인처럼 어떤 소리에 이끌려 그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길이 맞는 것일까? 수없이 방황하고 제자리를 돌며 부딪치기도 하고 낭떠러지로 추락하기도 하며 종국에는 그냥 어딘지도 모를 어느 곳에서 멈추게 되는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 나의 길을 물어보고 조언을 구하고 인도받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나를 참으로 의미 있는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인도자를 찾아나서야 하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삶의 앞날을 모르는 나는 누구의 안내를 받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누구를 따라가고 있는 걸까? 다음은 어느 시각장애인의 말이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발을 옮기기만 하면 목적지에 반드시 안전하게 도착합니다. 절대자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시는 그 절대자에게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절대자는 내일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그 분이 약속하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문득 내 삶의 인도자는 바로 주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여 안내에 순응하며 이 삶을 살아나간다면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으리라. 길을 잃거나 방황하거나 목적지를 잃어버리거나 하는 일 또한 결코 없으리라.
내일, 일주일, 한 달, 아니 단 몇초 뒤든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딱딱딱...딱딱딱...’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리는 소리를 내줄 수 있지 않을까? 위험한 상황에서 안전으로 유도하는 안내 방송이 될 수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친구나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나 조언이 될 수도 있고, 아무튼 소리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흰 지팡이처럼 벽에 부딪히지 않게 하거나 낭떠러지 앞에 섰을 때 돌아가게 유도할 수도 있고, 넘어지고 쓰러질 듯할 때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이렇듯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을 줄 방법을 찾다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안구 기증에 관심이 있었는데 자원봉사를 하며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다짐한 후 서약을 했다. 그런가 하면 꽤 오래전부터 매일 성체조배를 드리고 있다. 「성체조배 - 한달간 매일 드리는 조배 -」 「성 알퐁소 리고리오 지음, 도서출판 크리스챤」 책자를 명동성당에서 구입했다. 처음에는 책자를 갖고 다니며 기도하였지만 수 년 전 전권을 워드 작업하여 파일로 휴대폰에 저장해 이용하고 있다. 한 달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하며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성체조배 기도문에 따라 기도한 후 눈을 감고 앉아 이런 저런 청원을 해왔다.
그러다가 앞서 여러 경험들을 얘기했듯이 시각장애인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을 때 한 가지 기도를 추가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시각장애인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예수님의 현존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주님께서 시각장애인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고 당신께서 빛으로 인도하시어 그들이 잘 극복하고 헤쳐 나가기를 빈다. 나아가 앞을 보지 못하는 건 비단 시각장애인만이 아니라 누구나가 미래의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때 도움이 되어 주고, 또 본인도 누군가에게, 아니 주님께 그 도움을 기꺼이 요청하며 삶을 살아간다면 나을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또 하나의 시각장애인인 나를 주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앞길을 잘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으면서 모든 것을 의탁하고 발길을 내딛는다.
어느 날 눈을 감고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딱딱딱...딱딱딱... 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길을 찾는 소리다.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안내자가 되어 주자. 그리고 내가 길을 찾고 있다면 마음속에 그려진 십자가상의 주님을 내 삶의 인도자로 굳게 믿고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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