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연일 지속되는 어느 날이었다. 농수산물 시장에서 청과물을 유통하는 어느 업체가 연락을 주셨다. 사회복지시설에 자기들이 판매하는 과일을 기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양은 충분하니 기관의 차량을 가지고 와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것이다.
35도가 넘는 낮 기온에도 불구하고 1톤 트럭을 끌고 직원들이 그 청과물업체로 갔다. 품질이 최상품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직원들이 받아온 과일을 보고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20통의 수박을 반으로 잘라보니 속은 다 곯아있었다. 뜯지도 않은 상품이라며 주신 애플망고에는 곰팡이꽃(?)이 환하게 피어있었고, 복숭아와 자두도 성한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기부금 영수증은 시중가를 웃도는 금액을 요구하는 청과물 사장님의 당당함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무더위 속에 기나긴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었지만, 필자가 옹졸한 것인지 몰라도 여러 날이 지난 지금도 속상한 마음이 남아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자선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사회적 본성을 지닌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구성원 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질병이나 각종 사고로 인해 일시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고, 선천적 장애나 극심한 빈곤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복지의 역사 안에서도 시민들의 자발적 자선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대 이후 종교가 차지하던 사회적 비중이 감소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 대한 국가의 의무는 자연스레 강조된다. 또한 같은 시대에 발생한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 맞물리면서 ‘제도적 차원의 사회복지’가 시작된다.
하지만 국가주도의 사회복지뿐만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민간차원의 자선행위도 종교적 성격을 벗어나 지역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18세기 영국의 민간활동 조직인 자선조직협회(COS)나 인보관운동(Settlement movement)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과거의 자선활동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있다. 바로 ‘자선을 베푸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라는 위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사회복지법이라 여겨지는 엘리자베스 구빈법(1601년) 안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노동력을 기준으로 구분해 삶의 질에 대한 보장과 향상이 아니라 연명 수준의 개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종교적 동기에서 자선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자에 대한 존엄보다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성숙한 자선행위에서는 이러한 ‘차별’을 경계한다. 비록 지금 여러 이유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엄성을 더 낮은 등급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가르침 또한 이러한 위계적 자선을 경계한다.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정의에 따른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말하고 있다. 즉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평신도 교령 8항)는 점을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우리에게 강조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회복지시설에 사는 사람과 시설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 중 우리가 무시해도 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히 말한다. “장애인이 사는 사회복지시설이라 할지라도 쓰레기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후원물품들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김성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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