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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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69) 비천함과 고귀함.

참 빛 사랑 2019. 6. 18. 20:29





▲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미소함이며 고귀함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CNS 자료 사진





“N이 수녀님 보고 싶대요.”

“N이 누구죠?”

“에그. 수녀님 어렸을 때 늘 함께 붙어 다녔잖아요.”

순간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이 초점 흐린 흑백사진처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옆집에 살았던 아이. 목소리는 걸걸했고 하는 짓도 꼭 남자 같았다. 놀이에서 결코 진 적이 없었던 아이였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아이와 함께 구슬치기에서부터 고무줄놀이까지 온갖 놀이를 하면서 원 없이 놀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발령으로 다른 동네로 이사 가면서 그를 거의 잊고 살아왔다. 까마득한 옛날의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선뜻 만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까. 언니로부터 그 아이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 친구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너무 놀라 가슴이 철렁했다. 날 보고 싶다고 했다던 그 아이, 그런데 내키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던 나, 죄책감이었을까? 가슴이 답답했고 한동안 나 자신이 한없이 비겁하게 느껴져 우울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왜 그랬을까? N은 나의 과거이며 자아의 일부였다. 결국, 그 아이를 거부한 것은 나의 뿌리를 외면한 것이다. 공부도 못했고 거칠고 놀기 좋아했던 머슴애 같았던 그 아이, 바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비춰주는 그 원천을 천하게 여겼던 것이다. 나의 천함을 비추어주는 그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품어주었어야 했다. “잘 지냈니?” “잊고 지내 미안하다.” “어린 시절, 너와 함께 했던 수많은 놀이는 최고의 추억”이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 아이가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그때야말로 바로 어릴 적 나와 화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을 텐데 말이다.

사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더 신나게, 더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놀았던 힘으로 지금 내가 이렇게 힘 있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똑똑하고 잘나가는 친구가 나를 보자고 했어도 그랬을까?

살레시오 성인은 “세상 사람들은 다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수도자에게는 경의와 존경을 보내면서 똑같이 해진 옷을 입은 노동자나 걸인들에게 편견과 냉정한 시선을 보낸다”고 했다. 그렇기에 수도자들은 해진 옷을 입고 부자들 속에 들어가 명성을 얻어내려는 유혹을 받는다고 말했다.

수도자인 나는 낡은 옷을 입으면서도 나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는 자부심으로 자랑하려 했을까? 내가 입은 낡은 옷은 가난한 사람들이 입은 그런 옷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이 나의 눈과 마음을 가렸는지도 모른다. 수도자라는 신분이 내가 본래 미소하고 보잘것 없고 천한 자라는 것을 잊게 한 것이다. 그래, 원래부터 난 미소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이 미소함을 외면하고 감출수록 비천함으로 드러났고 그것을 알아챈 나는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비천한 자만이 비천함을 품을 수 있기에 비천하게 돌아가신 예수님, 비천한 종이 되어야 하느님의 돌봄을 받을 수 있었기에 스스로 낮은 자리에 머무신 성모님. 그렇게 그분들은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그 ‘천함’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비천한 이 자리는 힘들게 지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고귀한 자리야.”

그런데도 난, 왜 자꾸 낡은 옷을 입고 부자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걸까? 그렇게 하곤 또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성찰하기

1.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나요?

2.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나의 미소함이며 고귀함으로 들어가는 통로임을 믿어요.

3. “그 어떤 누구도 나보다는 더 크다”라고 입으로 되뇌고 고백하면서 ‘비천한 종’을 한없이 돌봐주시는 주님을 만나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