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는 어부’가 말씀의 그물 던진 갈릴래아
▲ 예수님은 이 언덕 어딘가에서 1만 명의 군중에게 산상 설교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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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과 여러 기적으로 ‘무형의 성전’을 지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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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르나움의 회당과 주거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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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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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c in Altum(라틴어 ‘깊은 곳으로 가라’)’ 성당. |
‘교회의 믿음’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23)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기원후 28년경이다. 예수님은 약 3년간 갈릴래아 호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과 여러 기적으로 ‘무형의 성전’을 지으셨다.
이스라엘의 젖줄 요르단강과 굽이굽이 연결된 갈릴래아 호수. 예수님의 숨결이 깃든 신성한 곳이다. 폭 15㎞, 수심 40m에 이르는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충분히 ‘바다’로 여겼을 만큼 드넓다. 그 시절 20여 개의 항구가 있었고, 어업과 수로 교통이 발달한 풍요로운 지역이다. 지금도 20여 종의 물고기가 잡히며 적지 않은 유다인들이 여전히 이 ‘황금어장’으로 고기잡이 배를 몰고 나가 전통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말씀을 통해 스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에 오르시어 1만 명에 이르는 군중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셨다. 산상 설교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첫 마디가 “행복하여라”였을까. 당시에도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 아프고 병든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자비롭게 되면 이를 수 있는 ‘하늘나라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를 펼치신 곳에 1937년 봉헌된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있다. 예수님의 여덟가지 참 행복 선언이 적힌 기념석들이 성당 밖 정원을 장식하고 있고, 길을 따라 아담한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팔각형 돔에 걸린 창문마다 라틴어로 적힌 팔복을 볼 수 있다. 순례객들이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설교 현장에 가득했을 뜨거운 기운을 느끼는 곳이다.
수많은 군중이 이곳에서 예수님 설교에 귀 기울였다니. 이렇다 할 음향시설도 없었을 그 시절, 드넓은 구릉지에서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 아마 예수님 따르는 이들의 ‘강한 믿음’이 작용했으리라. 언덕에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에 잠시 몸을 기대어봤다.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음성이 호수를 때리고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예수님은 ‘찾아가는 목자’였다. 갈릴래아 호숫가는 물론, 회당과 제자의 집, 산, 외딴곳, 심지어 멀리 시돈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만났다. 그 중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공생활 거점’이자 ‘기적과 설교의 현장’이었다.
카파르나움은 ‘부유한 상업 지역’이었다. 예수님은 많은 유다인이 거주하던 카파르나움 지역의 중심인 회당에서 설교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악령 들린 자와 중풍 병자를 치유한 예수님은 회당 바로 인근 베드로의 집에서도 아픈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다. 예수님이 자주 머물렀던 베드로의 집터 위엔 5세기 때 지은 팔각형 성당 터가 있고 그 위 어선 모형의 현대식 성당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회당 터가 있고 그 앞에 1세기 주거지가 펼쳐져 있다. 큰 규모의 회당만 봐도 과거 이 지역이 얼마나 번성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3㎞가량 내려오면 ‘일곱 개의 샘물’이란 뜻의 ‘타브가’ 지역이 있다. ‘오병이어 기념 성당’과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자리한 곳이다. 예수님은 치유를 넘어 굶주린 이들 5000명에게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일용할 양식까지 주셨다. ‘오병이어 기념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고 130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됐다가 19세기 들어서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시며 이 땅의 사도로서 ‘수위(首位)’를 맡겼다. 이를 기념하는 ‘베드로 수위권 성당’ 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갓 구운 물고기로 식사를 나눈 ‘주님의 식탁(Mensa Christi)’이 있다. 예수님이 차려준 밥상을 나눈 제자들이 부럽게 느껴지는 곳이다.
헤로데 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기원후 22년 갈릴래아 호수 서남부 지역에 세운 중심 도시 티베리아스. 이 지역 바로 옆에 위치한 ‘막달라’ 지역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이다. 그런데 2009년 이곳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집터, 어업 공장 터, 세례 터 등이 대규모로 발굴됐다.
본래 피정센터와 숙소를 짓는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그리스도 레지오 수도회 측은 이후 발굴에 전념했고, 현재 발굴터 뒤편에 숙소를 건립 중이다. 이곳 ‘막달라 회당’에서는 안티파스 시대 동전 4000여 개와 모자이크화, 유다교의 상징인 메노라(7개의 촛대)가 새겨진 돌이 발견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1세기 시절 회당이 발견된 것은 ‘막달라 회당’을 합쳐 지금까지 7곳뿐인 데다 카파르나움과 지척이며 예수님이 설교를 위해 다녀갔을 것으로 여겨져 의미가 크다.
발굴터 뒤쪽에는 2014년 ‘Duc in Altum(라틴어 ‘깊은 곳으로 가라’)’ 성당이 건립됐다. 예수와 제자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려진 각종 모자이크화와 ‘예수님의 배’를 형상화한 제대 등 성미술 작품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지하에 1세기 회당 모습을 그대로 연출해 만든 경당에서도 연중 미사가 봉헌되는 등 ‘막달라 성지’가 활발히 조성 중이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과 ‘사람’뿐이었다. 예수님은 세리, 죄인과 함께 식사를 나눴고 안식일에도 기적과 선행을 베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유다인, 사마리아인, 간음한 여자, 나환자, 이방인, 원수 등 신분과 지위 구분 없이 전해졌다. 모두를 위해 강생한 ‘치유자’요, ‘위로자’였다. 율법만 고수하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들은 그런 예수님을 비난하기 급급할 뿐이었다. 예수님은 이에 타보르산에 올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빛나는 옷을 입고 천상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