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도면만 가져가면 탱크도 만들어준다”
을지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말이다.
군수물자 제작에 쓰이던 공구 상가.
섬유산업 붐으로 생겨났던 미싱 상가.
아파트 부흥과 함께 늘어났던 조명·타일 상가.
6·25 이후 무너진 도시를 일으키기 위해 생겨난
가게들의 개업으로 을지로의 역사는 시작됐다.
한국 경제 상황에 따라 그 굴곡을 함께했다.
그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쇠를 갈고 깎는 소리가 지금도 방문객을 맞이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문이 들어오고, 기계도 돌아간다.
작년부터는 늘어가는 빈 공간에 청년 예술가들이 입주했고,
창작공간으로 운영되며 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
을지로를 즐기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문화 해설사와 함께 정해진 코스를 따라
을지로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골목길 투어 프로그램, ‘을지 유람’이다.
미로처럼 뻗은 골목마다 숨어있는 옛이야기를 만나보자.
“여기선 못 만드는 게 없어요”
공구의 종가, 을지로 공구거리
해설사를 따라 좁은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더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세월이 느껴지는 기계는 작은 못부터 생활 공구,
복잡한 모양의 금속제품들을 계속해서 토해낸다.
청계천 관수교에서 세운교로 넘어가는 남단 골목길에는
530여 개의 공구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지금도 도면만 들고 가면 그곳을 지켜온 장인들이
부품을 깎아 뚝딱 물건을 만들어준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가 지난 2008년 우주선에서 사용했던
등고선 촬영기도 이곳에서 제작됐다.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온 선배들에게
직접 기술을 배우며 일을 시작했다.
나로호 발사 때 로켓에 쓰인 연료통을 직접 만들었다.
첨단 기술도 기능인의 손끝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
- 한라금속 전용식
을지로만의 언어
공구거리를 지나다 보면 생소한 단어가 적힌
손글씨 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빠우 (금속 표현을 문질로 광택을 내는 작업),
빠킹 (물이나 공기가 새지 않도록 하는 고무, 금속 장치),
로구로 (다양한 재료를 회전시켜 성형하는 기술),
시보리 (금속판을 고속 회전시켜 금속 막대로 눌러 모양을 만드는 기술)
등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거치며
영어나 일본어로 조합된 단어들이 변모하며 남은 흔적들이다.
영화 같은 거리, 영화 같은 삶
그렇게 영화가 되다
깊고 낮은 어두운 골목길.
지나온 세월만큼 쌓여진 금속 잔해들, 때 묻은 공구와 공간들.
공구거리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를 내뿜는다.
산업화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은 영화 속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사채업자와 채무자 사이의 잔혹극을 다룬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이 일대에서 촬영됐다.
실제로 김기덕 감독은 세운상가 부근 공업사 골목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조의석·김병서 감독의 <감시자들>도 이곳을 배경으로 삼았다.
또 다른 을지로의 모습
조명·미싱·타일 특화거리
70~8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번영하던 조명, 미싱, 타일 거리.
다양한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으로
전국의 업자들이 ‘허리에 현금을 차고 와서 사들이던’
인테리어 재료 중심지였다.
최근 셀프 인테리어가 인기를 얻으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다시 늘고 있다고 한다.
대림상가, 청계 상가 일대에는
210여 개 조명업체, 140여 개 타일·도기 업체가 밀집해있다.
“이전에 배구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 20년 전부터 이곳 미싱 거리에서
미싱을 수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전만큼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요즘은 앤티크 미싱을 구경하기 위해 많이들 찾는다.”
- 일신미싱 부속상사 이정길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건물
세운상가
조명거리가 이어지는 골목을 나오면
을지로를 대표하는 세운상가와 만나게 된다.
70~80년대 서울을 상징했던 곳 중에 하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건물로 1968년도에 세워졌다.
을지로의 애환을 노래하다
노가리 골목
싼 가격에 하루 시름을 덜어낼 수 있어
일과를 마친 주변 공구상가 직원들이 자주 찾은 게 그 시작이었다.
1960년대부터 형성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지금도 직장인들로 북적인다.
을지로에는 수십 년 동안 간판도 바꾸지 않은
수많은 노포(老鋪)들이
저마다의 전통과 향미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암소 한우구이로 유명한 ‘통일집’(1969년)
평양식 냉면으로 이름난 ‘을지면옥’(1985년)
군만두가 맛있는 ‘오구반점’(1953년)
15종류의 다양한 전을 자랑하는 ‘원조녹두’(1946년)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송림 수제화
1936년 ‘송림화점’으로 을지로3가에 터를 잡은 뒤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림 수제화'도 빼놓을 수 없다.
80여 년간 4대를 이어 운영하며 이 골목의 역사가 됐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수제화 업체 중 가장 오래된 집으로
석고로 발 모양 본을 떠 맞춤 제작하고 있다.
6.25 후 영국군 군화를 개조해 한국 최초의
등산화를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산악인 고상돈,
김영삼 전 대통령,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 등이
이곳 장인들이 만든 신발을 신었다.
이곳은 지금도 산악인 허영호 대장의 등산화를 맞춤 제작하고 있다.
“을지로 골목은 서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변화하는 을지로를 오래 간직하기 위해 사진과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다.
이제 작업을 시작하는 젊은 작가로서 개인 작업실을 갖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만의 작업 공간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예술가들에겐 행복한 일이다.”
- 을지로 기록관(을지 5호) 이현지 작가
새로운 숨을 불어넣다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
‘을지 유람’의 마지막 코스,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장에서
작품을 함께 만드는 ‘공방 체험’이다.
서울시 중구에서 지난해부터 을지로 일대의 빈 공간을
청년 예술가들에게 제공하는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임대료의 10%만 부담하면 작업실로 쓸 수 있다는 소식에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예술 공간은 모두 6곳.
각각의 이름이 있지만, 을지 1~5호라는 별칭도 붙여졌다.
이들은 인근 상인과 함께하는 작품 활동도 준비 중이다.
도자기 작품을 만드는 ‘Public Show’와
예술 창작 공간 ‘SlowSlowQuickQuick’ (을지 1호)
새를 모티브로 다양한 예술작업을 펼치는 ‘새 작업실’ (을지 2호)
창작과 예술교육을 실천하는 ‘R3028’ (을지 2-1호)
가구·조명을 디자인하는 ‘산림조형’ (을지 3호)
폐 자전거로 인테리어 소품을 제작하는 '써클 활동’ (을지 4호)
사진과 영상으로 을지로의 역사를 담아낼 ‘이현지 을지로 기록관’ (을지 5호)
“을지로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을지 유람의 지도와 안내판 디자인에 참여했다.
별것 아닌 거 같지만 을지로 골목 곳곳에 남아 있는 옛 정취들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을지로를 오랫동안 마주하고 싶다.”
- 산림조형(을지 3호) 소동호 작가
시간이 멈춘 골목길
을지로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오랫동안 서울의 구도심으로 자리 잡아온
을지로 3가 일대에서는 재개발 정비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보행전용도로, 공원, 최대 80m 높이의
주거·업무·숙박 시설이 생길 예정이다.
도시는 변하게 돼있다.
새로운 사람이 모이고 새로운 기능이 부여되며
그 힘이 도시를 변화시킨다.
을지로는 과거의 흔적과 현재,
변화가 예정된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곳, 을지로 유람을 떠나보자.
을지유람
기간 : 2016년 3월 ~ 11월 (월 2회 / 둘째, 넷째주 토요일)
시간 : 오후 3시 ~ 4시 30분
신청 : www.junggu.seoul.kr(중구청 홈페이지)
문의 : 02-3396-5085 (중구청 시장경제과)
문화야 놀자 더 보기
만든 사람들
글 곽새롬 사진 최대우
디자인 최수영 퍼블리싱 신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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