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그리고 돌담길..132년 만에 '완주'해볼까
[경향신문]
서울 덕수궁 돌담길이 132년 만에 연결됩니다.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첫 골목. 이전에 국세청 별관 자리는 전시공간이 됐고, 시원하게 드러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었던 세실극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좀 걷다보면 기와를 얹은 철문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1884년 자리잡은 주한 영국대사관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의 총 길이는 1.1㎞입니다. 영국 대사관이 덕수궁 옆에 자리를 잡으면서 부지 내 70m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연결도로 100m 등 170m 구간이 끊겼습니다. 이 때문에 주한 미국대사관저 방향으로 갈 때 덕수궁을 빙 둘러가야 했죠.
서울시는 올해 28억원을 들여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주변에 폭 3~6m, 연장 170m 보행로를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4년 10월부터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를 영국대사관과 협의했다고 합니다. 오는 5월까지 보상을 마치고 연말까지 보행로를 완공할 계획입니다. 보행로 조성에 맞춰 덕수궁 돌담길 경관 시설도 개선해 근대유산과 전통 궁궐이 어우러진 밤거리를 만듭니다.
▶영국대사관에 막힌 덕수궁 돌담길 132년 만에 170m 연결…연내 개방
건축물은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한 시대의 건축물에는 그 시대 사상과 사람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전쟁과 재개발로 많은 건축물이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서울 중구 정동에 근·현대 건축물들이 가장 많이, 밀집돼 있는데요. 덕수궁 외에도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립미술관(과거 대법원, 그 전엔 가정법원),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러시아공사관, 이화여고, 건축가 김수근의 경향신문사옥까지 모두 정동에 있는 근현대 건축물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꼽히는 덕수궁 돌담길. 132년 만에 걷게되는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시죠.
■덕수궁의 과거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자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꼈습니다. 현재 덕수궁 자리는 세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 개인저택이었고, 1593년 임진왜란으로 피신했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온 뒤 이 곳에 임시거처를 정했습니다. 이어 광해군 때 정동 1번지 일대를 궁궐 경내로 편입하고, 행궁을 경운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광해군이 유폐된 뒤 한적한 별궁 정도로 다시 축소됩니다. 그러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이어 정궁(正宮)이 됩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됐지만, 이듬해 다시 중건이 됩니다. 1906년에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에는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미술관으로 쓰이는 석조전은 1910년 세워졌네요. 현재 6만1500㎡ 면적에 대한문, 중화문(中和門), 광명문, 중화전(中和殿), 석어당(昔御堂), 준명당(俊明堂), 즉조당(卽祚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정관헌(靜觀軒), 석조전(石造殿) 등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규모가 작고,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해 전각 배치도 정연하진 않습니다. 거기다 조선 말 서양식 건물을 세워 다른 궁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죠.
“고종은 왜 덕수궁에 서양식 건물을 지었을까? 덕수궁 문화유산해설사 박행자씨는 “고종황제가 외국 손님을 맞고 조선의 국력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석조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근대운동에 관한 건물과 환경 형성의 기록조사 및 보존을 위한 조직인 도코모의 한국 회장을 맡고 있는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석조전은 콜로니얼 양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콜로니얼 양식이란 말 그대로 식민지 건축이다. 서구 열강은 동남아를 침탈하면서 서양식 건축물을 세웠는데 이게 본토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기후가 다르면 건축도 달라지는 법. 1·2층 테라스에 늘어서있는 기둥, 길게 빠지는 추녀 등은 동남아풍이란 설명이다. 중명전도 비슷하다. 아열대 지방에나 있을 법한 테라스를 만들었다. 1920년대 큰 화재 이후 아예 테라스를 막아서 재건축했다. 때문에 원형과는 달라졌다. 중명전은 당시에는 덕수궁 내 러시아공사관과 미국공사관 사이에 세워졌다. 외세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경계하려 했던 의도라고 한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치욕의 현장이다.”(경향신문 서울 속 異國… 벽돌로 쓴 역사 기록)
■덕수궁의 현재
“구한말 서양은 힘을 앞세워 조선에 들어왔다. 영국, 러시아, 미국, 일본인들은 저마다 건축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물론 당시의 건축물들은 전통적인 건축물과는 다르고, 독특해서 눈길 주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저 “예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정동의 근대건축물이다. 황제가 머무는 궁 안에서나 궁궐 밖에 새겨진 건축물들에서는 갈팡질팡 방황하는 대한제국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으며 눈 감을 수도 없다.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역사는 역사다. 당시의 건축물은 벽돌로 쓴 역사서다.(”경향신문 서울 속 異國… 벽돌로 쓴 역사 기행, 최병준 기자)
“석조전은 1898년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고 1900년(광무 4) 공사를 시작해 순종 때인 1910년(융희 3) 완공됐다.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설계됐다고 한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했다. (중략) 해방 이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원형은 완전히 훼손됐다. 덕수궁 석조전이 5년간의 복원공사 끝에 104년 전 축조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고 한다. 대한제국 선포일인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소식이다. 19세기 세계사의 파도를 넘지 못했던 ‘황제의 정궁’ 석조전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여적]덕수궁 석조전)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이라고도 불리는 덕수궁 돌담길은 대한민국의 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다. 수많은 노래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이곳을 연인이 걷고 나면 얼마 안돼 헤어진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아마도 옛날 이 곳에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런저런 유명세만큼이나 이 길은 아름답다. 사계절 가로수가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1차로 일방통행로는 자동차보다 사람을 배려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또한 인근에는 문화시설과 고궁이 위치해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인기 있는 거리다.”([길,숲,섬]연인과 함께 걷고 싶은 길, 덕수궁 돌담길)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 이문세 ‘광화문 연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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