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세계교회(국제)

유머 감각만 있어도 성인이 될 수 있다?.

참 빛 사랑 2018. 6. 1. 21:02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통해
‘유머의 성덕 쌓으라’ 강조


▲ 한 신자를 만나 호탕하게 웃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자료사진】




“성인들은 기뻐했고 유머가 넘쳤습니다. 소심하고 시무룩하고 신랄하고 우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발표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22항)에서 유머도 성덕을 쌓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뒷담화만 안 해도”에 이어 “유머 감각만 있어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의 얘기다.

교황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성인들 가운데 영국의 성 토머스 모어(1478~1535)를 예로 들었다. 「유토피아」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헨리 8세 왕이 자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반기를 들자, 왕명을 거역하고 단두대로 걸어나갔다. 그는 단두대에서도 “아, 내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일이 없지” 하며 수염이 칼날에 잘리지 않도록 턱을 앞으로 쭉 내밀었을 정도로 최후 순간까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웃음과 유머가 부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복음에는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사건이 넘쳐난다. 하지만 예수의 수난과 죽음, 죄와 벌, 희생과 절제 같은 ‘장중한’ 중심 주제에 시선이 더 머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예수가 화를 내셨을지언정 웃으신 적이 없다며 중세식 엄숙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얼굴’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끝 부분에서 ‘미소를 모르는 신앙’을 악마라고 칭한 것은 이런 엄숙주의에 집착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은 없다. 제자들이 ‘아재 개그’ 같은 썰렁한 유머로 스승을 웃겼다는 얘기도 없다. 웃음이라면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비웃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럼 예수는 정말 웃은 적이 없을까. 기록되지 않았을 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에 분명히 웃었을 것이다. 유머는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냉면을 가져온 평양을)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는 가벼운 유머로 남북 정상회담장 분위기를 바꿔놓았듯 유머에는 반전의 힘이 있다.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면 성경에서 예수의 미소와 웃음소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예수가 산에 올라 군중에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3-12)며 참 행복을 가르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그분 얼굴에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봄바람만큼이나 온화한 미소가 피었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마르 10,16) 주실 때의 표정은 어땠을까. 품으로 돌진하는 아이를 끌어안는 아빠처럼 함박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쳐놓은 교묘한 올가미를 치워버리고도 통쾌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오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속셈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살아온 세월만큼 죄가 쌓인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 위선자들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느냐고 떠봤을 때도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르 12,17)라는 재치 넘치는 말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을 보면서도 웃지 않았을까.

제자들, 특히 베드로 때문에도 적잖이 웃었을 것 같다. 예수는 큰소리 떵떵 치고 나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지레 겁을 먹고 맥주병처럼 가라앉으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봤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여줬다. 그분의 웃음과 유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교황이 신앙인의 유머를 언급한 취지는 딱딱하고 완고한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는 “복음 선포자는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복음의 기쁨」 10항)는 당부와도 맞닿아 있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