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남자 포콜라레(마리아사업회)에서 활동했던 마사오 후안 아라가키 신부가 2월 23일 아르헨티나에서 선종했다. 향년 82세.
아르헨티나 출신인 아라가키 신부는 평생 동정 포콜라리노로 살다가 지난 2017년 12월 대전교구 천안봉명동성당에서 당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현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추기경) 주례로 74세 고령에 늦깎이로 사제품을 받았던 포콜라리노 사제다. 대전교구 소속 사제로 사제품을 받았지만, 포콜라레에 영구 파견됐었다.
그가 늦게나마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포콜라레 총본부가 50여 년 동안 봉헌생활자로서 충실한 삶을 산 그를 포콜라리노 사제로 서품해줄 것을 유흥식 주교에게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2016년 6월 68세의 늦은 나이에 마찬가지로 사제품을 받은 동생 마리오 아라카키(페루 리마 포콜라레 공동체) 신부와 나란히 ‘포콜라리노 형제 신부’로 살았다.
1944년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오키나와 출신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66년 12월 포콜라레에 입회했으며, 1967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로피아노 포콜라리노 학교에 들어가 양성 과정을 마쳤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포콜라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팔레르모대학 수학과를 졸업했고, 신학 과정은 일본 조치대(1999~2002)와 교황청립 칠레가톨릭대(2011~2014)에서 밟았다.
특히 그는 1974년 5월 이탈리아 출신 디오니시오 코사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한국 남자 포콜라레의 문을 열었고, 1980년까지 7년 동안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남자 포콜라레의 초석을 놓았다. 이어 일본 남자 포콜라레에서 오랫동안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활동하다가 사제품을 받은 뒤 고국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남미 남단 코노수드 지역 포콜라레에서 활동해왔다.
신문취재팀
'여론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홍택의 중고로운 평화나라] 법적 마인드가 지배하는 세상의 단상 (0) | 2025.03.01 |
---|---|
[현장 돋보기] 코페르니쿠스의 고뇌 (1) | 2025.03.01 |
[신앙단상] 내가 먼저 자비를 입었음을 깨닫는 은총(김하윤 가타리나, 한국가톨릭젊은이성령쇄신연합 회장) (0) | 2025.03.01 |
[시사진단] 극우의 병리(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0) | 2025.02.28 |
마산교구 총대리에 백남국 신부 임명 (0) | 202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