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을 모두 함께 기뻐합시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성탄이 인간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지만, 아기 예수님께는 세상 고통의 시작이십니다. 그래서 기뻐함과 동시에 감사드림이 합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유를 처음으로 만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류의 구세주께서 초라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너무 슬퍼 구유를 만들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진실로 순수한 마음으로 경배드리는 모든 이에게 이 성탄의 신비가 깊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복음에는 성탄의 신비를 ‘임마누엘’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임마(with, 함께), 누(we, 우리), 엘(God, 하느님), 즉 육화, 강생을 의미합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성탄의 신비를 표현합니다. 육화, 사람이 되심은 희랍어로 사륵스(SARX), 즉 살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덧없음을 수용하셔서 죽어 없어지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중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지상 여정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함께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과거 은사 신부님께서 사제 피정을 지도해주시며, 이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유다인 수용소에 한 가족이 잡혀 왔습니다. 아침에 흩어져 일터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저녁때마다 그 아버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노모와 작은아들을 제일 먼저 확인하곤 했습니다. 가스 수용실로 끌려가는 순서는 노동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부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제노역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큰 아들이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놀라 어찌 된 일이냐고 소리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한 말은, 좀 전에 장정들이 할머니와 동생을 데리러 왔고, 동생은 필사적으로 어머니에게 매달렸다고 합니다. 낚아채는 장정에 의해 동생은 나뒹굴었고, 어머니는 동생에게 “아들아, 걱정 마라. 내가 같이 가마!”하고 가스실로 가는 무리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동생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편안한 얼굴로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향했다고 합니다. 비록 죽으러 가는 길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가기 때문에 안도하는 아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들을 혼자 보낼 수 없어 기꺼이 따라가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그래도 사람이 좋다」, 장성숙)
세상이 힘들고 어려운 일투성이에 고통만 가득하더라도 희망과 기쁨을 갖는 이유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시라, 그분을 통해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을 통해서도 이 의미를 새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그렇게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용기를 내라고, 힘을 내라고, 언제나 항상 늘 함께 하시겠다고 오셨습니다.
특별히 이번 성탄은 가난한 이들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성탄이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이 위로받는 성탄이면 좋겠습니다. 상처받은 이들이 사랑으로 치유되는 성탄이면 좋겠습니다. 성탄을 간절히 기다렸던 이들이 그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성탄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성탄을 기뻐합시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감사드립시다.
이계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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