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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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제8회 신앙체험수기] 가작/ 어머니의 일기

참 빛 사랑 2021. 3. 14. 20:42

신혜숙(안나, 서울대교구 중계동본당)

▲ 일러스트=김현진

 



세상엔 환난이 늘 있어왔지만 그래도 2020년은 특별한 해였다. 연초에 지구촌으로 불어 닥친 코로나19. 그 초유의 바이러스는 인간 생명에 대한 위협은 물론 경제 위기라는 쌍날칼로 전 세계인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어두운 서사는 아직도 끝자락이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불확실성의 나날을 살아가는 중이다.

아들 부부가 맞벌이를 하기에 코로나 이전의 나는 내 집과 아들네를 오가며 손녀를 돌봐주었다. 한데 코로나로 며느리가 휴직하자 전에 없던 시간 여유가 주어졌다. 그 덕에 나는 내 시간을 누리며 50년 넘게 써온 친정어머니의 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1962년 1월 1일부터 2015년까지 일기를 기록했는데, 평소엔 당신 일기를 절대 보지 못하게 해서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고 가족들이 어머니를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그 비장의 일기를 볼 수 있었다. 학력이라야 국문을 깨우친 정도인 어머니지만 일기엔 당시의 처절했던 심경과 생활상이 매우 섬세하고도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기에 초장부터 내 누선을 건드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당시 우리 가족이 처했던 상황과 오늘날의 어려운 서민들 삶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힘든 이웃과 내 가족사를 나누며 어머니와 내가 만난 하느님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1960년대 무렵. 명동에서 전화상회를 하던 우리 아버지는 많은 빚을 지고 어느 날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것도 한 여인과 함께였으니 가족의 충격과 아픔은 단순한 물질고(苦) 그 이상이었다. 서른 중반의 젊은 어머니는 삼남매를 거느리고 허구한 날 빚쟁이들로부터의 시달림과 식량조차 떨어진 생활고 속에서 삶을 헤쳐나가야 했다. 자연히 짜증과 역정을 자주 내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진 욕설을 쏟아낼 때의 어머니를 볼 때면 저러고도 천주교 신자라고 할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일기의 첫 페이지는 설날 장면이다. 막내인 남동생이 떡국을 먹지 못해 질질 눈물을 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웃집 개도 떡국을 먹는데 우린 왜 떡국이 없느냐며 막무가내로 조르는 것이다. 이렇듯 어두운 정경과 함께 이어지는 일기는 지옥 같은 생활고의 연속극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암울한 현실에 백기를 들며 자식들과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극약을 사 들고 와서 당신 세 자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 함께 이 약을 먹고 죽자고. 그러자 동생은 엄마와 죽겠다고 하는데 나는 울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제동을 걸었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 자살은 천주님(그때는 하느님을 천주님이라 호칭했다)께 죄가 되는 거예요.”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 시절엔 중고등학교 진학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우리 남매들은 공부를 잘해서 나도 언니가 다니던 명문 E여중에 응시했고 거뜬히 합격하여 입학식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빚쟁이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곤 입학금을 채가려고 내게 갖은 유도신문을 하곤 했었다. 나는 이 자살 위기 대목에서 잠깐 멈추며 옛 기억을 소환해보려 눈을 감았다.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나운 빚쟁이들에 시달리고 끼니를 주리던 것들은 선명한데도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했던 일이며 내가 어머니에게 울면서 했다는 사연들은 남 얘기인 듯 생소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일기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당시 내가 했던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눅눅한 장면을 읽다 말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지? 수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로 내 가슴도 늘 공포와 불안에 절어 있지 않았는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사는 게 너무도 두렵고 막막했을뿐더러 어머니도 동생도 죽겠다는데 내가 무슨 배짱으로 자살에 동의하지 않은 거였을까. 얼마 남지 않은 쌀자루마저 들고 가는 빚쟁이 아줌마에게 쌀자루만은 돌려달라고 매달렸건만 그녀는 내 손등을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으로 할퀴며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그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 회오리 속에서 내가 무슨 낙을 보겠다고?

나는 어머니 신앙으로 일찌감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하셨기에 주일 미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았고 주일학교도 물론 열심히 다녔다. 그 덕에 첫 영성체 교리를 받느라 외워야 했던 천주교 요리문답이며 계성여중고에서 매주 수녀님께 주일학교 교육을 받았던 내용들이 머릿속에 알뜰히 저장돼 있기는 했다. 자살이 대죄라는 것도 그 시간을 통해 뇌리에 새겨진 거였으리라. 그러니까 그렇게 받은 교육 내용이 그 날의 결정적 순간에 내 입을 통해 튀어나온 거고 어머니는 나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어 삶을 이어나간 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과연 내 힘으로 한 거였을까 하고. 아닐 거라고. 어쩌면 그건 하느님이 어린 자식의 입을 빌려 어머니의 자살 충동에 제동을 거신 것일 거라고. 신앙생활이란 우리네 삶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지를 각자의 깜냥만큼 해석해 내는 일 아닌가.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일기를 보니,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어머니는 이후에도 간간이 자살 유혹의 덫에 걸려든다. 어느 날인가는 언니와 내가 눈물로 어머니를 만류하는 사연이 담겨 있었다. 언니는 “엄마, 내가 이담에 돈 많이 벌게요” 하고, 나는 “엄마, 내가 공부 열심히 할게요” 하면서 엄마에게 자살을 말리는 광경이. 동생은 이때도 엄마 따라 죽겠다는 순종파로 등장한다. 죽고 싶다는 의지(어머니와 동생)와 죽지 않겠다는 의지(언니와 나)가 두 파로 나뉘어 팽팽히 길항하는 가운데 우리 가족의 삶은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당시 우리의 밑바탕에 가톨릭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네 식구가 다 같이 죽음의 유혹이 이끄는 급류에 맥없이 쓸려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모습에서 신앙은 물론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자로 사람 인(人)자는 두 획이 마주 받치고 있는 형태다. 인간이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회인 가정은 하느님의 역사와 섭리가 이루어지는 소공동체다. 혼자서는 도무지 감당키 어려워 생각해 낸 어머니의 파계(破戒) 유혹을 하느님은 때로 어린 자식들을 방패 삼아 막아주신 것 같다. 한편 가족이란 세상에서 둘도 없는 혈족끼리 구성되었기에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다. 서로의 치부를 속속들이 잘 알고 항상 피부로 접하는 사이기에 그렇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의 관계도 그러했다. 집안의 몰락으로 우리는 서울 중구에서 변두리로 밀려났다. 어머닌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동네로 이사 간 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수차례씩 물 지게를 지고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내렸다. 때론 힘에 부쳐 물 지게와 함께 넘어지기도 하고 눈길에 미끄러져 몸을 다치기도 하였다. 그 동네엔 군데군데 주인 모를 무덤이 있었는데, 어머니 일기엔 무덤 속의 사람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어머니의 물 지게는 커다란 바위 덩이를 매일같이 산 정상으로 올려놔야 하는 ‘시지포스의 바위’였다.



어머닌 빈 쌀독을 들여다보며, 이중 살림하느라 가뭄에 콩 나듯 집을 찾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그로 인한 울화를 당신 자식들에게 내 쏟곤 했다. 한창 예민할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는 이런 어머니에게 반항적이었다. 가난도 지긋지긋했으며 자주 신경질을 부리는 어머니도 보기 싫었다. 아버지에겐 아마도 신경을 끄고 살지 않았나 싶다. 가끔씩만 찾아오는 분인지라 마주칠 기회가 적어 상대적으로 갈등이 덜했을 터니 허구한 날 부딪치는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삶이란 과연 살아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두고 나는 깊이 고민했다.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인생은 고(苦)라 하지 않던가. 일찍 삶을 포기하면 그만큼 인생의 쓴맛도 덜 맛보게 될 게 아닌가. 나 하나 사라지면 우리 부모가 짊어질 생활비도 덜어주는 게 아닌가. 이유들은 끼리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찾아왔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지구를 떠나버리자고. 이 쓰디쓴 잔을 엎어버리자고. 나는 작정하고 ‘세코날’이란 수면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 약으로 자살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래 선가 약국에선 구매자의 주소와 이름을 물었고 많은 양을 팔지 않아 두어 달에 걸쳐 40여 알 넘게 마련했다. 그러곤 기회를 엿보았다. 집에 식구들이 있으면 불발에 그치지 쉽다. 아무도 모르게 해야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을 당할 염려도 없다.

마침내 행동개시 하기에 좋은 날이 찾아왔다. 어머니와 아버진 지방으로 봇짐장수를 떠나고 마침 집이 빈 날을 택해 나는 그 알약들을 몇 번에 나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죽음을 결심하니 죽는 건 별로 두렵지 않았으나 ‘자살은 하느님 명을 거스르는 대죄’라는 교리가 억센 생선 가시처럼 가슴에 걸렸다. 나는 묵주를 손에 쥐고 주님과 성모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비록 주님 명을 어기고 목숨을 끊지만 영원한 형벌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나는 주님을 믿지 않거나 반항하는 게 아니라 단지 삶이 싫은 것뿐이라고, 그러니 성모님은 이런 죄인을 위해 전구해달라고. 잠이 오기 시작했다. 묵주를 손에 쥔 채 나는 꿈도 없는 어둡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하느님이 내 죽음의 방패가 돼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약을 먹은 뒤 전개된 일들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몽롱함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식구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며칠 만에 정신이 들었을 때 부끄럽고 민망해서 아무에게도 그간의 경위를 묻지 못했다. 어머니의 일기엔 당시의 상황들이 적혀 있었다. 그 일로 나는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당시 내가 헛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가정을 돌보시라고. 엄마가 불쌍하다고. 물론 나는 그 일도 기억에 없다. 사람이 살아온 기록을 남긴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를 새삼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자살을 우리 형제들이 막아주었다면 내 자살은 우리 가족들이 막아준 게 되었다. 병원에 실려 가 응급 처치를 받으며 의식을 되살리는 동안 우리 가족, 특히 어머니는 미어지는 가슴으로 울부짖으며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주, 성모님께 받치셨을까. 한편 딸의 늘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번번이 자살 충동을 느끼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하셨을 것도 같다.

이후로도 우리 식구의 삶은 해가 들지 않는 먹구름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교통비가 없어서 먼 길을 걸어오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비루한 생활상을 적어나가며 하느님 원망도 적나라하게 펼쳐놓았다.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도 끊이질 않았다. 제대로 먹이지 못해 누런 얼굴로 빈혈기를 드러내는 세 자녀를 보며, 자주 바닥을 드러내는 막막한 쌀독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우리 쌀독 좀 채워달라고 기도하는가 하면 오기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다 박완서 소설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가 떠올랐다. 그녀는 가톨릭에 입교 후 사랑하는 남편과 젊은 아들을 잃었다. 그녀는 생떼 같은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자신이 징그러워 토할 것만 같았다고 했고, 수만 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좋겠다고 했고, 사랑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울부짖었다. 포악이 맹렬하게 치밀면 신은 죽이고 죽여도,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죽일 여지가 남아 있다고,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된다고 저주했다. 신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라고,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도 음흉한 힘이라고.

삶의 극점에서 만나는 통렬한 고통들은 내용은 서로 달라도 인간을 광란으로 몰아 자아 분열을 일으키며 오장을 끊는듯하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나의 어머니도 주님과 자문자답을 하며 1967년 9월 22일 일기 제목을 ‘죄인에게 말하소서’라고 달아놓았다. 읍소인 듯 으름장처럼도 와 닿았다. 그 날의 어머닌 자신의 신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다. 당신이 그런다고 내가 당신을 버릴 줄 아느냐고, 어디 당신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고. 작가 박완서가 그 참척의 아픔 속에서 수없이 쳐 죽이고 싶은 하느님이 있었던 게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 되었듯 어머니 또한 덤벼들 수 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내밀한 심정을 가감 없이 토해 낼 일기가 있었기에 질식과도 같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인가는 주일 미사를 드리며 이런 기도를 했던 기록이 있었다. 빚 독촉에 살기가 힘드니 이 죄인을 더 이상 살려두지 마시고 데려가 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버릴 거라고. 그러면서 성모상을 바라보니 성모님은 그럴 수 없다고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고. 그럼 이런 나를 어찌하란 말이냐고, 하루면 몇 번이고 넘실거리는 한강을 바라본다고.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는 성당의 십자고상을 바라보던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정말로 주님이 보여주신 환시였는지 아니면 지친 어머니의 심경에서 헛된 것을 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려나 그 날 어머니는 분명히 가시관의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적었다. 그 사건은 어머니로 하여금 하느님은 분명히 계시다는 걸 재확인시켜 준 것 같았다. 하늘엔 언제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지만 태양이 뜨면 그 별빛은 태양의 위력에 묻혀버리듯 어머니 역시도 자신의 고난 속에서 십자고상 환시를 바라보며 당신의 고통이 잠시 무화되는 체험을 한 것 같았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도 실은 주님을 믿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살아간다. 계신 듯도 하고 안 계신 듯 하기도 한 존재가 하느님이신지라 인간 대다수는 신앙적 갈대일 수밖에 없다. 한데도 나의 어머닌 수없는 원망을 쏟아놓으면서도 그분의 실체만은 부정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점이 나는 영 신비하고도 신기하기만 했다. 동시에 그게 어찌 어머니의 힘이었을까 싶었다. 주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 주셨듯 하느님 존재에 대한 어머니의 그 요지부동한 믿음 또한 그분께서 은총으로 주셨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주님은 어머니의 숱한 고난 속에서 갑옷 같은 신앙의 옷을 입혀주심으로서 수도 없이 솟구치던 가족 동반 자살의 충동을 막아주신 것 같다. 때로는 자식들을 통하여 때로는 환상 같은 체험을 통하여.

아버지는 여전히 당신의 기분만을 위해 살아가며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평생 기도했지만 기도한 만큼의 공허감에도 빠져들었다. 성당 구역 봉사를 통해, 레지오 활동을 통해 많은 이들을 하느님 품으로 오게 했으면서도 정작 남편 하나 구령(救靈)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먹통인 듯한 하느님이 답답하기도 했다. 5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둔 병상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였는데 그 후엔 놀라울 만큼 영성의 성장을 보이며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하느님을 알게 해준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드러냈으며 ‘당신은 위대한 여자’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진통제도 듣지 않는 간암 말기의 단말마적 고통이 찾아들 때면 십자가 상 예수님 성화를 가슴에 품고 신음 소리를 삼키려 노력했다. 아프면 소리를 지르라고 해도 “주님은 아무 죄 없이 우리 위해 돌아가셨는데…”하며 고통을 삼키다가 임종을 맞았다. 어머니는 그 변화가 기적 같고 꿈만 같다고 했다. 식도정맥류 파열로 검붉은 피가 요를 흥건히 적시는 절명의 위기에서 급히 본당 신부님을 모셔와 대세라도 받게 하려 했을 때조차 하느님을 완강히 거부하던 아버지였다. 그때 어머니는 이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줄만 알고 하느님이 끝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걸로 여기면 낙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벼랑 끝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의 소경 눈을 열어주시어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해주셨다.

▲ 일러스트=김현진



코로나로 인한 칩거 기간은 내겐 ‘코로나 블루’를 모르는 화해와 감사의 시간이었다. 나는 53년에 걸친 일기를 읽어나가며 어머니와 얽혔던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뒤늦게 해방될 수 있었다. 탑처럼 쌓인 일기를 발췌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든 것이 비로소 보이는 듯했고 지난했던 삶의 숨결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짜증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자식들을 고생시킬 걸 뭐하러 낳았냐고 철없이 덤볐던 일도 떠올랐다. 그런 일들이 상기될 때면 코로나로 만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내 눈가는 젖어들었다.

한편으론 가난과 역경, 아버지의 오랜 부재 가운데서도 빗나가지 않고 성장한 우리 형제들에게도 새삼 자긍심이 일었다. 부실한 끼니를 이어갔으면서도 무탈하게 자라준 것에도 가슴이 저릿했다. 등잔을 켤 석유마저 떨어졌던 어느 날 밤 마루에서 우리 삼남매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대목을 읽을 땐 가난 속의 그 훈감함이 왠지 숨 막히도록 아름다워 울컥했고,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들의 눈동자가 서로를 향해 반짝였을 것을 상상하며 목이 메었다. 서글퍼서가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남루하고 고달픈 삶일지언정 그 속에서도 사막의 샘 같은 감미와 위로가 깃들 수 있다는 걸 발견한 데서 오는 감회의 눈물이었으므로. 마지막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해 좋은 기억을 남겨주신 아버지에게도 거듭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아버지가 하느님을 모르고 돌아가셨다면, 고통 앞에서 그렇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 모두는 가정에 소홀하고 당신 기분대로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물지 않았을 게 아닌가.

십여 년쯤 전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갔더니 방바닥에 그간 써온 일기장을 펼쳐놓고 꼼짝을 않으셨다. 어머니는 얼마 후에야 나를 알아보며 일기장 뒤에 ‘도 마리아, 너 참 애썼다’고 적을 참이라고 했다. 돌이키면 몸서리가 쳐지면서도 한편 그 혹독한 세월을 이겨낸 자신이 뿌듯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엄마, 힘들었던 그때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낸 게 참 감사하지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말을 삼켰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저도 숱한 고생하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그때 제 목숨을 살려주신 주님께 깊이,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라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전도서(코헬렛)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희로애락은 배경만 달리할 뿐 본질은 유사하게 반복된다. 세상의 고통은 비슷한 주제로 변주(變奏)되고 삶의 신산함은 오늘날의 약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살아낸 시절엔 먹을 것이 궁했고 겨울엔 영하 19℃까지 내려가는가 하면 주거환경도 지금보다 허술해서 훨씬 추웠다. 그런 집에서 연탄이 떨어지면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요즘은 적어도 그런 고생은 덜할 것이나 물질적 풍요 속에서 빈부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개천에서도 나올 수 있던 용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전과 다른 시대적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코로나로 더욱 어려워진 요즈음,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힘들어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려는 유혹에 빠질 것인가. 내 어머니가 무수히 생을 포기하고 싶었듯 나 역시도 비슷한 시절을 거쳐 왔기에 고통받는 그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건 신의 부재일 테다. 마주 대할 궁극의 구원자를 만나지 못할 때의 인간이 시련에 허덕일 땐 그 몸부림과 파괴력을 자신이나 사회로 겨누게 마련이다. 감사하게도 내겐 어머니로 인한 신앙이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불특정 다수의 휘청거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실 것을 주님께 청한다. 인류와 생명체는 온갖 질곡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왔다. 숱한 이들이 경험했듯 살아내면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닌가. 거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진다면 마침내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감사함과 더불어 역경을 이겨낸 스스로가 놀라워 울림 깊은 주님 찬미 기도가 장엄한 교향곡처럼 저마다의 영혼을 채우게 될 것이다. 뭇 신앙의 인간들이 그러했듯이, 내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 뒤안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듯이.



신혜숙(안나, 서울대교구 중계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