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스키 대교 전경
이 대교는 히라도섬과 이키쓰키 섬을 잇는 대교로1991년에 개통, 전장960m 폭은 6.5m 해면상 31m 주요양부
800m의 3경간 연속 트라스교. 중앙경간의 지간400m는 이형식에서는 세계제일 이라 합니다.
이키스키 서녁 석양
함께한 전세버스와 해안 전경
풍력 발전기 모습
박물관 실내 촬영 불가로 실외만 ...1층고래잡이생활전시관,2층은가쿠레 기리스탄전시관입니다
고래의 조형물
고래잡이 배의 유물전시
기리스탄이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또는 그 신자를 가리키는 말.
그리스도교도를 뜻하는 포르투갈어'cristão'에서 따온 말로, 특히 16, 17세기에 건너온 가톨릭 선교사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본인을 말한다. 현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기리스토쿄'라 불리운다.
최초의 포르투갈 상인이 내항한 지 불과 6년 후인 1549년 프란시스 하비에르가 이끄는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왔다. 이후 17세기에 약 50만 명을 헤아리는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예수회와 이어 들어온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이 새로운 종파의 성장은 정치적 위기감을 높여 봉건적인 일본정부는 네덜란드인·중국인·조선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 상인들을 쫓아내게 되었다.
최초의 선교사 일행이 상륙할 당시 일본을 통일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는 자신의 권력이 커감에 따라 불교의 막강한 정치적 힘을 꺾기 위한 일환으로 기리시탄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억압받던 농민들은 구원의 복음에 이끌렸지만, 상인들과 무역상의 이익을 염두에 둔 다이묘[大名]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럽과의 교역에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로 보았다. 오다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98]는 이 외래종교에 대해 훨씬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들은 예수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경쟁관계에 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역상의 이해관계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도요토미는 신하들이 바티칸의 외세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1587년 도요토미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에게 일본을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가혹하게 실행된 것은 10년 후 9명의 선교사와 17명의 일본인 기리시탄이 박해받은 때부터였다.
도요토미가 죽고 나이어린 그의 양자에 의한 대리통치가 곧 끝나자 탄압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1603~1867]를 창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점차 외국 선교사들이 정치적 안정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1614년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를 통해 기독교를 금지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의 아들과 손자가 권좌에 있는 동안 가혹한 박해가 한 세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많은 기리시탄은 그리스도교를 버리도록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하면 유배를 가거나 고문을 당해야 했다. 모든 가정은 한 불교 사원에 등록할 것을 명령받았고 승려들은 소속 신도들에 대해 정기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1637~38년에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에서 일어난 기리시탄들의 '시마바라 반란'은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후 그리스도교 신앙을 뿌리뽑으려는 노력은 더 강화되었다. 1650년까지 기리시탄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유배되거나 처형되었으며 발각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지하로 숨어 가쿠레[隱れ] 기리시탄(숨어사는 기리시탄)이라 하는 비밀 종교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주로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와 시마바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적발되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써야만 했는데 예를 들면 그들은 성모 마리아 상(像)을 관음보살로 위장하여 사용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가쿠레 기리시탄이 2세기 동안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몰랐고 19세기 중엽 가톨릭에 대한 금지령이 다시 완화되었을 때 일본에 들어온 유럽 성직자들 역시 일본에 그리스도교인이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1865년 나가사키에 가톨릭 성당이 하나 세워져 1597년에 희생된 26명의 순교자들에게 봉헌되자 그때까지 사실을 숨겨왔던 가쿠레 기리시탄 2만 명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들은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에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 초기 일련의 개혁이 진행될 때 자신들의 신앙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신봉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오랫동안 숨어지낸 그리스도교인 1만 4,000여 명은 유럽 성직자들과 관계를 맺어 가톨릭 성당으로 들어갔으나 많은 생존자들이 2세기의 고립기 동안 가쿠레 기리시탄에 흘러들어온 불교 등의 비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더이상 숨어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된 기독교인이란 뜻을 가진 하나레[離れ] 기리시탄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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