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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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농촌 선교의 즐거움, ‘일상 언어’로 복음 전하며 가까워지는 맛

참 빛 사랑 2022. 11. 6. 18:08

평신도 주일에 만난 사람 / 춘천교구 원통본당 이상덕 선교사

▲ 용대공소 앞에서 이상덕 선교사가 서 있다. 용대공소는 1층 규모의 단촐한 건물이다.
 

11월 6일은 55회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 주일을 앞두고 춘천교구 원통본당 용대공소 이상덕(이사악) 선교사를 만났다.

이 선교사는 하의도ㆍ은곡ㆍ강촌ㆍ상남공소, 그리고 진도본당 내 여러 공소를 거쳐 현재는 용대공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로 살고 있다. 이 선교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의 언어로 전하는 게 평신도 선교사라고 말했다.

“저는 감사한 게 시골에 살면서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 것이에요. 시골, 농촌의 문화가 이해되니까…. 제가 쓰는 언어는 고급 언어가 아니에요. 이들의 문화에 맞춰 단어를 쓰는 거죠. 예를 들어 ‘은혜받다’라고 하기보다는 ‘살맛 난다’,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기보다 ‘너는 하느님의 피붙이야’ 그러는 거죠. 그게 더 가깝고 알아듣기 쉽잖아요.”

이 선교사는 “좀 외진 곳에 사는 분 중에서 주님이 찾으시고자 하는 양 한 마리를 만날 때 참 보람이 있다”며 “신자 몇 분과 함께하는 예수님 복음이야기는 오늘도 참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며 “그래서 저는 농촌 선교가 좋다”고 환하게 웃었다.



35년째 이어진 선교사의 삶

이상덕 선교사가 평신도 선교사로서 일을 시작한 건 1987년 서울에서 2년 과정의 교리신학원을 졸업하면서다. 선교사가 된 지 벌써 35년째, 그동안 섬과 산골 마을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첫 선교지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있는 광주대교구 하의도공소였다. 이를 시작으로 진도본당 내 16개 공소, 춘천교구 강촌공소, 대전교구 홍성본당 은곡공소, 춘천교구 기린본당 상남공소에 이어 원통본당 용대공소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용대공소에 온 지 벌써 8년이 흘렀다.

이 선교사가 맡은 공소는 용대와 천도리 두 곳이다. 용대공소에 20여 명, 천도리공소에 30여 명 등 전체 신자는 50여 명이다. 용대공소는 농촌 지역이지만 지역 특성상 신자들은 대부분 황태 덕장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식당, 펜션 등을 운영한다. 천도리공소에도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식당 등 장사하는 신자들이 많다. 원통본당과 용대ㆍ천도리공소는 한 본당으로 운영된다. 원통본당의 주일 미사 첫 시작은 오전 9시 용대공소에서 봉헌된다. 이어 11시 원통본당에서 주일 낮 미사가, 오후 4시 천도리공소에서 주일의 마지막 미사가 있다. 이 선교사는 오전 9시 용대공소에서 미사를 드리고, 오후 3시쯤 원통본당 주임 김용태 신부와 함께 천도리공소로 가 미사를 봉헌한다. 매달 마지막 주일은 공소 신자들이 원통성당에 모여 본당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식사도 하며 친교를 나눈다. 옛날과 달리 교통 여건이 개선돼 원통과 용대 간 4차선 도로가 놓이고, 천도리까지도 포장도로가 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교리신학원으로 간 청년

이 선교사는 젊은 시절 군 복무 중 얻은 허리 통증으로 고생했다. 직장 관계로 일본에서 살 때 어느 날 묵주기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묵주기도 27일 만에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이날의 경험이 32살의 그를 교리신학원으로 이끌었다. 교리신학원에 입학했지만 처음부터 선교사가 되려던 건 아니었다. 교회 가르침의 맥을 잡을 수 없어서 답답해 하던 차에 교리신학원에 가면 무언가가 더 선명해질 것이란 기대감에 교리신학원 문을 두드리게 됐다.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 건 교리신학원 과정을 마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방학 동안 현장 실습이었다. 한 번만 갔다 오면 되는 실습을 3번이나 갔다. 마지막 실습지가 하의도공소였다. 한 달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반 모임을 하고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했다. 헤어지는 날 얼마나 정이 많이 들었는지 많은 신자가 부둣가에 나와 이 선교사를 전송했다. 떡 보따리를 배에 실어주며 인사를 나눌 때 어떤 여성 신자 한 분이 ‘잘 가시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순간 부둣가는 눈물바다가 됐다. 부두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이 선교사 머리에 “누군가 저분들과 함께 살아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네가 살면 되지”라는 큰 울림이 나왔다. 그는 결심을 적어 배가 지나는 장산 앞바다에 던지며 선교사로 일할 것을 하느님께 약속했다. 교리신학원 마지막 학기를 마친 이 선교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하의도공소로 향했다.

1991년 진도본당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 로마에 있는 세계적 선교 기구인 ‘마더 에클레시아’(Mother Ecclesia)에서 세계 20개국 교리교사 선교사를 초청해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제안이 왔다. 선교회 담당인 서울대교구 유병일 신부의 도움으로 이 선교사는 기꺼이 로마로 갔다. 1994년 한국에 돌아온 후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강촌공소에 파견됐다. 당시 한적한 시골이었던 춘천교구 강촌공소는 이 선교사의 적극적인 노력 덕에 본당으로 승격됐다. 이때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다시 생겼다. 로마에서 5년간 선교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그가 돌아갈 곳은 대학 강단이나 연구소가 아니었다. 귀국 후 농촌 마을인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기린본당 상남공소를 택했다.



사제와 신자, 서로 사랑해야

이 선교사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안으로 시작된 시노달리타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남다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사목현장에서 많은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는 공소의 현실은 솔직하고 적나라하다. “옛날 공소에는 공소 회장이 권위도 있었고 열심히 했습니다. 신자들의 신심이 컸고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면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농촌도 도시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어 “옛날에 어려움을 해결할 길 중 하나가 기도였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거였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며 “이른바 신심이 있는 알곡 신자들은 오지만 쭉정이 신자들은 많이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자주 보는 본당 내 상황도 담담히 전했다. “실제로 싸우는 분들도 많습니다. 냉담자의 90%는 사람 때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사제와 정말 멱살 잡고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냉담하는 걸로 싸우는 거예요. ‘당신 있을 때는 안 나올 거야’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사제에게 책임을 돌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중에 몇 분은 삶이 팍팍해서 갈등이 있을 수도 있고 본성상 그럴 수도 있지만, 성사 중심의 교회에서 사제가 갖고 있는 고유한 직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사랑이 이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용대공소가 포함된 춘천교구 중부 지구 중에 수도자(수녀)가 있는 본당은 홍천본당이 유일합니다. 사제는 ‘착한 목자’가 본연의 일이니까 권위도 주고 존경도 해야 합니다. 대신 신부님들은 양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선교사가 생각하는 시노달리타스는 신자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시노드합시다. 그런데 이 단어를 시골 어른들이 다 모르잖아요. 늘 쓰는 단어가 아니잖아요. 시노드도 모르고 달리타스도 모르고 이해도 안 되는 단어를 생활에서 실천하라는 건데 그걸 어떻게 달성하겠어요? 방법은 딱 하나에요. 본당 신부님이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 물이 흘러나오듯 강론 때 내보내는 겁니다.”

실제로 원통본당에서는 본당과 공소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문구를 만들었다. 교구 시노드 과정에서 ‘본당에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본당에 만족하는지’ 등을 신자들에게 묻고 네 개의 답 중에서 하나의 정답을 고르게 하는 방식으로 설문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 선교사의 꿈은 앞으로도 계속 선교사로 사는 것이다. “교구와 언제까지 계약하고 선교사로 지낼지 모르겠습니다만 은퇴하면 캠핑카 하나 끌고 간단한 복음 이야기 같은 강의를 10강 정도 준비해서 전국의 공소를 다니는 겁니다. 강의는 ‘그리스도론’하고 ‘성사론’ 등 몇 개면 충분합니다. 한 명이 있으면 어떻고 5명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저는 강의를 할 때 한 명만 있어도 신이 납니다. 어차피 배운 게 이 일이잖아요.”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