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통한 신앙 전파] 1. 성 베네딕도회 앙드레 부통 신부
▲ 앙드레 부통 신부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중동 등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벽화를 남겼다.
그림은 부통 신부가 그린 예루살렘 성모 승천 대수도원 지하 성당 벽화.
▲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앙드레 부통 신부는 화가 선교사로서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여러 교회의 벽화를통해 복음을 선포했다. |
지난 글까지 총 22회에 걸쳐 1954년 성미술 전람회의 출품작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 가톨릭 성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를 되돌아보았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협력해 이루어낸 1954년 전시는 지금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가톨릭 미술의 역사는 1960년대에 들어서 외국 수도회 신부들의 예술 선교 활동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특히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의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OSB, 1904~1978) 신부와 앙드레 부통(Andr Bouton OSB, 1914~1980) 신부가 남긴 교회 건축과 벽화 작업들은 우리나라 성미술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이정표다.
한국인의 풍습과 한국 고유의 색채 담아내
그중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은 1960년대부터 성 베네딕회 왜관수도원에서 화가로서 예술 선교에 매진했던 프랑스인 신부 앙드레 부통이다. 부통 신부는 1970년대 중반 한국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간 전국 각지의 성당에 벽화를 제작했다. 그가 국내에 남긴 벽화의 수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지방 공소를 중심으로 20여 점 이상의 벽화가 남아 있어 그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부통 신부는 벽화 외에 판화, 세라믹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남긴 작품에서 당시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인의 모습과 한국의 풍습, 한국 고유의 색채를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현재 대전교구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 남아 있는 2점의 벽화를 중심으로 현재 소실된 부통 신부의 나머지 벽화들을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 그의 작품과 예술 선교에 대해 함께 살펴보는 일이 더욱 의미 있을 것 같다.
앙드레 부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2011년 프랑스 위스크의 생 폴 수도원(Abbaye Saint-Paul de Wisques)을 방문해 자료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 위스크수도원에는 그의 생애를 요약한 문서와 이스라엘, 한국, 베트남에서 제작한 벽화에 관련된 스케치와 관련 자료, 컬러 슬라이드 필름 등이 남아 있어 현재 소실되었거나 훼손된 그의 작품 원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부통 신부가 제작한 필사본과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세라믹 작품, 습작 스케치들 그리고 그의 여행 관련 기록 등을 통해 그의 다양한 작품 활동과 독특한 예술세계의 전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부통 신부는 1914년 4월 26일 프랑스 지엥(Gien)에서 오를레아네즈(Orlanaise)사의 보험사무소를 경영하는 부친 슬하에서 태어났다.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는 고향인 지엥의 생 프랑수아 드 살(Saint-Franois-de-Sales)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를레앙 대신학교(Grand Sminaire d‘Orlans)에서 2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튀니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1934년 프랑스 북부의 위스크(Wisques) 대수도원에 입회하여 1936년 6월 29일에 수도 서원을 하고, 1940년 2월 25 쿠르쿠 주교(Mgr Courcoux)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을 입은 부통 신부는 벨기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체포됐다가 탈출해 위스크수도원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이후 솔렘(Solesmes)에서 1년간 수감자들에게 전하는 소식지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사온에루아르(Sanes-et-Loire) 지방의 디고안(Digoine)으로 피신해 있던 위스크수도원 수사들과 합류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동체는 위스크에 다시 자리를 잡았지만, 부통 신부는 제3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1949년 5월 8일 위스크를 떠나 모로코의 세프루(Sefrou)를 거쳐 알제리의 틀렘센(Tlemsen)에서 독일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수도원 출신 라파엘 발저(Raphael Walzer)의 수도원에 소속되어 지냈다. 이 수도원이 사라지자 몇 해 동안 모로코에 있는 툼리라인(Toumliline)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교회에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1956년 9월 1일부터 1957년 9월 20일까지 위스크에 돌아와 지내던 부통 신부는 다시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1962~1963년 도미니코회에서 운영하는 예루살렘 성서학교(Ecole Biblique de Jrusalem)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시나이반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팔레스타인의 갈릴래아 호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여러 성당에 벽화를 남겼다.
예술로 신앙 전파한 ‘하느님을 위한 순례자’
부통 신부는 중국, 일본, 한국 등 주로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1964년부터 10여 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전국적으로 벽화 작업을 통한 예술 선교 활동에 매진했다. 한국 체류 기간에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벽화 작업을 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 일신상의 문제로 일본으로 떠났으나 건강 악화로 짧은 일본 체류를 마치고 1977년 9월 프랑스 위스크수도원으로 복귀했고, 1980년 3월 10일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뒤인 3월 12일 릴(Lille) 시립병원에서 선종했다.
그는 한국 체류 이전에 특별히 미술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열두 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도회 입회 후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쓰겠다는 소명을 지니고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예술가가 되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닐 것’이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결심대로 프랑스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예술을 통한 신앙 전파에 힘썼다. 스스로를 ‘떠돌이 화가’라고 하면서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등장하는 ‘하느님을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pter Christum ; Peregrinari pro Deo)’의 예를 언급하면서, 베네딕도회의 정주(定住)의 규칙을 어겼지만, 이 역시 하느님을 위한 봉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 교미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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