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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56)우리를 무너뜨리는 사소한 유혹들.

참 빛 사랑 2019. 3. 17. 21:03




▲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나 작고 사소한 유혹에 무너질 때가 많다. CNS자료사진



누구나 넘어서기 어려운 유혹이 있다. 일상의 리듬을 깨는 사소한 유혹에서부터 인생을 망치는 커다란 유혹까지. 내게는 어떤 유혹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스캔들을 일으킬만한 부도덕한 유혹이 아니다. 보잘것없고 사소하다. 쉽게 간과하는 작은 유혹들이다.

해야 할 일인데 하고 싶지 않은 유혹,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싶은 유혹이 순간순간 나의 선택을 기다린다. 바쁜데 운동을 할까 말까. 급히 가야 하는데 복도에 떨어진 휴지를 주울까 말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다가갈까 말까. 말다툼 후 사과를 할까 말까. 기도를 더 할까 말까. 사순시기인데 금식을 할까 말까. 사소한 생각은 쉽게 굴복하게 한다. 한순간 나를 망가지게 할 수도 있는 커다란 유혹은 엄청난 고통이 와도 용감하게 거부할 텐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지는 게 습관이 되면 그 습관은 일상이 되고 내가 된다.

언젠가 강의할 때 젊은이들에게 일상에서 포기하기 어려운 일이 무어냐 물었다. ‘잠’ ‘여행’ ‘음식’ ‘놀기’ ‘커피’ ‘사랑’ 등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누군가 ‘스마트폰’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스마트폰을 언급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은 스마트폰을 포기해도 되나요?”라고 묻자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죠. 스마트폰은 너무 당연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 말인즉 ‘스마트폰’은 유혹이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절제’는 언감생심 말도 꺼내지도 말라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이들에게 스마트폰은 더는 유혹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혹이란 어떤 대상을 선택할지 말지 고민하고 갈등할 때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렇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음식이나 옷, 사물과 사람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감이 사라진다.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유혹이 아닌 당연히 취해야 하는 분신이다.

어쩌면 유혹 자체가 그 무언가를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유혹 앞에 고통을 느끼는 것도 은총이 아닐까 싶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주님과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오, 주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나는 네 마음 안에 있다.” “유혹으로 가득한 더러운 제 마음에 계시다니, 어찌 주님께서 그곳에 산다는 말입니까?” “너의 그런 생각과 마음이 고통이었더냐? 즐거움이었더냐?” “더 말할 나위 없는 고통이며 슬픔이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에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누구였겠느냐?” 가타리나에게 고통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거룩한 현존의 표시였다.

나는 매일 아침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내 영혼을 돌보기 위해 무언가 결심을 세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 내 정서적인 뇌는 본능적 감각신호를 보내온다. “힘들어.” “그만해.” “피곤해.” “오늘은 괜찮지.” “내일부터 해.” 결국 이런 작은 유혹에 항복하면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

살레시오 성인은 영혼이 상부와 하부로 나뉜다고 했다. 하부는 상부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부는 유혹에 대항하지 않고 협상하고 싶어 한다. 자유롭고 안전하게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갈등과 고민, 인내와 고통을 버텨내라는 상부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동안 사소해 보이지 않았고 느끼지 못했던 작은 유혹들, 그래 그 앞에서 고통받을 수 있다면 은총이고 희망인 것을. 맘껏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용기를 감히 청해본다.



성찰하기

1. 작은 일상에서 매번 굴복하는 유혹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이미 습관이 되어 일상이 되고 내가 된 것은 아닐까요?

3. 이번 사순시기에는 사소하지만, 영혼의 소리를 멀리하게 하는 마음속 작은 유혹 앞에 고통 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해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