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 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 간호사 숙희와 박 의사가 이용의 처인 임이네를 두고 하는 대화다. 이웃에게 미움받고 남편에게는 사랑 잃고 아들에게까지 외면당한 임이네. 그는 고독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탐욕의 화신으로 삶을 살아왔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조차 “수틀리면 행패 부리고 입에서는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오고 그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슬픔이 아닌 저주이고 협박”이니 말이다.
임이네란 인물은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가련한 여인이었다. 그는 사랑의 허기짐을 ‘돈’에 대한 탐욕으로 채우고 철저하게 자기만을 챙기며 살아왔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도 원한이 쌓이고 쌓여 터질 것 같은 분노의 독소에 미쳐버려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면 신마저 물어뜯겠다고 저주를 퍼붓는다. 임이네는 무엇 때문에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가족과 이웃에게 외면당하고 미움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박 의사 말대로 스스로 잘못된 인생을 살아서일까? 무엇이 먼저였을까?
우리는 쉽게 “자기 하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곤 한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도, 거부를 당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수녀 공동체 안에서도 쉽게 화를 내고 험한 말로 공동체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수녀가 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속에서 그를 향해 일어나는 비난과 판단이 상대방이 아닌 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한다. 불편하면 피하고 외면하면서 사랑은커녕 친절한 말 한 마디도 건네기도 어렵다. 그리곤 “너 때문이야” 하며 타인에 대한 편견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를 품지 못하는 내 속 좁음과 나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에고’(ego, 자아)는 저만치 감춰두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너의 성격을 망치는 일이 너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망가진 성격을 지녔을까. 불우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세상이 품어주기만 해도 몇 번이고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성격 아닐까 싶다. 뇌의 뉴런은 서로 연결돼 끊임없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뇌는 과거의 기억과도 연결돼 있지만 새로운 경험과도 연결돼 언제나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
남편과 아들이 임이네의 손을 따뜻하게 한번 잡아줬다면, 그저 조건 없이 사랑의 눈길 한번 보내줬다면 사랑할 줄 몰랐던 임이네에게 새로운 사랑의 감정 패턴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다. 누군가 나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내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아서다. 사랑이 먼저일까? 미움이 먼저일까?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면 누가 먼저 사랑을 해야 할까?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
성찰하기
1. 상대에 따라 부정적 감정 수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가까이 갈 수 있어요. 우선 친절한 태도로 가까이 갈 기회를 찾아요.
2.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욕이 나올 정도라면 건강한 거리유지를 해야겠지요.
3. 건강한 거리유지는 굳이 가까이 가지는 않더라도 험담하지 않고, 중립적 태도로 그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아요.
4.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무조건 그를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해줘요. 언젠가 그 축복은 나에게 먼저 오지 않을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