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끝까지 봐야 한다. 물론 끝이 뻔한 영화도 있다.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았대요’라며 결말을 내는 영화, ‘이렇게 끝나? 어이없네!’ 할 정도로 허망하게 끝나는 영화도 있다. 또 악당은 모두 죽고 주인공만 살아남거나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도 있다. 거창하게 시작해서 싱겁게 끝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엔딩 크레딧이 나오고도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을 주는 영화가 있다. 나는 끝을 말하지 않는 영화가 좋다. 끝이 없는 끝은 고스란히 현실로 옮겨와 나를 깨워주기 때문이다.
영화 ‘체리의 향기(The Taste of Cherry)’에서 주인공 바디는 고단한 삶을 포기하고 죽기로 한다. 낡은 자동차를 타고 거칠고 메마른 길을 가로질러 자살을 도와줄 사람들을 애타게 찾다가 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남자의 제안에 응하면서 자신도 한때 나무 위에 올라가 목매달아 죽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목을 매려던 나무가 체리나무였는데 무심코 따먹은 열매는 향기롭고 달았단다. 노인은 체리의 맛과 향에 취해 계속 따먹다 보니 돌연 세상이 너무 밝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체리의 향기는 참으로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디는 ‘그래서 뭐가 달라지느냐’며 냉소적으로 묻는다. 노인은 ‘내가 달라진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긴다. 결국, 바디는 파놓은 구덩이 안에 누워 약속한 시간에 노인이 와서 흙으로 덮어주길 기다린다. 그렇게 영화는 끝을 내는 듯했다. ‘과연 노인은 바디의 자살을 돕기 위해 나타날까?’ ‘바디는 결국 죽었을까?’하는 의문을 품던 터에 새벽이 되자 화면은 밝은 채도로 바뀌고 우렁찬 군인들의 함성이 들린다. 당황스럽게도 주인공 바디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스태프들과 감독이 등장해 ‘촬영이 끝났으니 돌아가자’고 한다. 메이킹 필름인지 영화의 끝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영화의 끝은 없었다. 단지 현실로 돌아왔을 뿐이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 적이 있다. 영화 중간에 사람들이 떠나고 몇 사람만 남았다. 대화 장면이 많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가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들은 ‘너무 재미있다’며 감동적이라고 했다. 느리고 지루하고 묵직한 영화, 그러나 영화의 끝이 모든 지루함을 한 방에 날려준 것 같았다. 물론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 어떤 스펙터클한 극적인 장면도, 위기와 갈등도 없었다. 단지 카메라의 시선만 달라진다. 마치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 것처럼 밝은 초록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면서 군인들의 생기 넘치는 움직임과 스태프들의 밝은 표정이 그대로 나의 현실로 다가오면서 ‘내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줬다. 영화는 ‘지루함은 당신의 시선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019년 한 해가 시작됐다. 새해를 앞두고 내 삶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한 해를 시작할 때면 지난 시간이 싱겁게 흐른 것 같아 허탈하다. 그렇다고 새로운 한 해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새롭게 마주하는 한해가 흑백의 세계처럼 막막하게만 보인다. 어쩌면 매년 소소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찾지 못한 건 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을 말하지 않는 영화처럼 내 삶에도 끝은 없다. 늘 지금 현실로 돌아오는 ‘시작’만 있다. 그러니 새해에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달라져서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찰하기
1.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면서 힘들었던 일, 사람, 장소, 사건들을 그대로 펼쳐놓아요.
2. 상처가 있다면 저항하기보다 아프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3. 그리고 작고 소소하지만 감사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바쳐요.
4. 새해에는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으로 생각하고 살아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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