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쿰란
▲ 사해 협곡 유다 광야에 있는 쿰란 동굴. 1947년부터 1956년까지 대대적 발굴을 통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을 찾아냈다. |
예루살렘에서 43km 떨어진 사해 북서 연안 해발 300m 고지 유다 광야에 '키르베트 쿰란'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20세기 고고학의 최대 발견이라 평가받고 있는 사해 두루마리(사해 사본) '쿰란 문서'가 발견된 곳이다. 쿰란 문서는 구약성경과 공동체 규칙,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 등 예수 시대 전후 유다이즘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대한 발견 대부분이 우연에 기인하듯 쿰란 문서 발견도 극적이다. 1947년 봄 어느 날, 15세의 베두인 목동 무하마드 아드-디브가 친구와 함께 황폐한 바위산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어지는 쿰란 협곡에서 가축을 몰고 있었다. 문득 양 한 마리가 뒤처진 것을 알아챈 그는 주변을 찾아 헤매다가 머리 위 절벽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동굴 입구를 보았다. 소년은 그 동굴에 양이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놀래켜서 나오게 하려고 돌을 집어 던졌다. 소년의 기대와 달리 동굴에서 들려온 것은 양 울음소리가 아니라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호기심에 친구와 함께 동굴에 들어간 아드-디브는 8개의 항아리를 발견했다.
▲ 쿰란 에세네파 공동체 유적. 이들은 자신들이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는 자라고 믿었다. |
이후 쿰란 일대 탐사가 시작돼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서 대규모 발굴 작업을 펼쳤다. 그 결과 키르베트 쿰란 일대 200여 개 동굴 가운데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 양피지와 파피루스 두루마리, 4만여 개의 사본 단편들을 찾아냈다. 아울러 200여 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우물과 물 저장고, 1000여 개의 식기류가 보관된 식방, 토기 작업장, 사본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수로, 대부분 남자인 1100여 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이로써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서기 68년까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음을 확증하게 됐다.
▲ 쿰란 에세네파 유물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정결례를 행하며 독신생활을 했다. |
▨쿰란 공동체
쿰란 문서와 유적 발굴로 이곳에 살았던 공동체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초세기 학자 필로와 요세푸스, 소 플리니우스의 문헌에 소개된 '에세네파' 가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에세네파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시작된 '하시딤'(정의, 경건, 충절)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카베오 독립전쟁(기원전 166~160년) 때 마타티아스를 추종한 하시드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시리아의 안티오코스에 저항했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이후 기원전 152년 셀레오코스 왕조 안티오코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에피파네스가 요나탄을 예루살렘 성전 대사제로 임명했다(1마카 10,18 이하). 이때 쫓겨난 성전 대사제는 추종자들과 함께 유다 광야에 공동체를 꾸리고 스스로 '에세네'(빛의 자녀들, 의로운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라고 불렀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을 공유하고 공동식사를 하면서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했다. 또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라고 이해했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대신한다고 여기며 메시아 사상과 종말론에 심취해 유다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도 철저히 지켰다.
쿰란 에세네파 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후 로마군의 주둔지가 됐다.
▲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구약성경 사본. 이 두루마리 사본은 당시 최고의 구약 사본보다 최소 1000년 이전에 쓰인 성경으로 판명났다. |
▨쿰란 문서
쿰란에서는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 사본 200여 개가 발견됐다. 대부분 문서는 히브리말과 아람어로 양피지와 파피루스에 쓰였고, 일부 헬라어(그리스말) 문서도 있다.
쿰란 문서는 당시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이었던 「알레포 사본」(925년께 기록)보다 최소 1000년 이전에 쓰인 성경이다. 이 쿰란 문서 발견으로 '구약성경 내용이 중세를 거치면서 왜곡됐다'는 일부 주장이 일축됐고, 제2 경전까지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인정하는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줬다.
10. 갈릴래아
▲ 이스라엘 생명의 젓줄인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과 은혜로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사진은 갈릴래아 호수 전경. 이창훈 기자 |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예수께서 기쁜 소식 '하늘 나라의 복음'을 처음으로 선포하셨던 생명의 땅 '갈릴래아'. 예수께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이곳 갈릴래아에서 행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군중에게 참행복을 선언하고 여러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 부활하신 다음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설교에 대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에 대해 선포하신다. 그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며 세상과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금 벌써 행동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정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세상의 고삐를 손에 쥐고 계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매우 간결하다. '하느님은 지금 행동하신다'"(「나자렛 예수」 1권, 111~112쪽 참고).
▨갈릴래아 지방
1세기 유다계 로마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갈릴래아 지방 경계를 동쪽으로 요르단, 서쪽으로 아코와 카르멜산,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베트셰안, 북쪽으로 비카 지역 일대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 인근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예수 시대 때 갈릴래아 호숫가 크고 작은 마을은 204개나 됐다. 예수의 주요 활동지로 성경을 통해 잘 알려진 카파르나움, 벳사이다, 겐네사렛, 티베리아스, 막달라, 타브가와 같은 어촌과 산중에 있는 코라진, 쿠르시 등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던 마을이었다. 1세기 당시 가장 작은 마을도 1500여 명의 주민이 있었다 하니 예수 시대 갈릴래아 지방에는 대략 30여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릴래아는 원래 구약 가나안 사람 땅이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뒤 즈불룬ㆍ아세르ㆍ납탈리 지파 유다인들이 가나안 사람과 갈릴래아에서 어울려 살았다(판관 1,30-33). 이후 단 지파 유다인들도 갈릴래아에 정착했다.
휴경지가 없을 만큼 비옥한 갈릴래아 지방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 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이사 8,23; 마태 4,15)라고 멸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가 이스라엘은 1948년부터 2년에 걸친 시리아와 레바논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갈릴래아 지방 전역을 차지했다.
▲ 배는 갈릴래아 사람이 그랬듯이 예수님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갈릴래아 호수는 워낙 넓고 깊어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
▨갈릴래아 호수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60여㎞, 나자렛에서 30여㎞ 올라가면 갈릴래아 호수가 나온다. 갈릴래아 호수는 하프 모양의 유다인 전통 악기 '키네레트'를 닮았다 해서 히브리 사람들은 "얌 키네레트"라 불렀다. 이를 로마인들은 '갈릴래아'라 했고, 오늘날 영어로 '갈릴리'라 표현한다.
또 마르코(1,16; 3,7)ㆍ마태오(4,18; 14, 25)는 '갈릴래아 바다'라 하고, 루카는 '겐네사렛 호수'(5,1), 요한은 '갈릴래아 바다''티베리아스 바다'(6,1)를 혼용해 표기하고 있다. 이는 바다와 호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얌'으로 표기하는 히브리말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생긴 혼선이다. 지중해 해수면보다 약 212m 낮은 갈릴래아 호수는 남북 길이21㎞, 동서 폭 12㎞, 둘레 52㎞, 넓이 170㎢, 깊이 49m로 호수라기보다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풍광도 수려하다. 3~4월이면 야생 양귀비가 호숫가를 주홍색 꽃빛으로 물들이고, 한여름에는 대추야자나무와 수초들이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낸다. 가을에는 황금 갈대의 고고함과 겨울에는 북풍의 성난 파고를 잠재우는 햇살의 넉넉함이 순례자들을 여유롭게 한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갈릴래아 호수는 평화로운 주변 풍광과 달리 무척 변덕스럽다. 한낮에는 잔잔하다가도 일교차가 심한 날이나 기온이 내려가는 일몰 때는 풍랑이 거세진다. 호수 북동쪽에 자리잡은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푄현상을 일으켜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큰 파도를 만들어 낸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주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 다니셨다. 배에 올라 앉아 호숫가에 있는 군중들에게 설교하셨고(마태 13,1),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기도 했다(마르 6,32). 또 물 위를 걸으시기도 하고(마태 14, 22-33),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도 행하셨다(마르 4,35-41).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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