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순교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안내자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피땀이 범벅이 된 순교자의 발걸음을 묵상하면서 올라가면 한 켠으로는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 켠으로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되어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소가 있던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 중에는 전국 곳곳에 이름도 채 남겨 놓지 못한 채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무명의
순교자들이 많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몇 가지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보면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 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을
시작해 2002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셔졌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도 마련돼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가 마련돼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 된 고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내포 지방 신앙의
못자리
공세리
천주교회는 1895년 파리 외방 선교회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당시 동네 한 가운데 신자집을 임시로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며 시작되었다. 그
후 1897년 창고 건물(현 사제관)을 헐고 구 성당과 구 사제관을 임시로 지었다.
현재의 성당이 위치한 80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 곡창지(貢稅 穀倉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성종 9년(1476년) 세곡 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중종 18년(1524년) 80칸의 창고를 지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원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집결한 후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세금을 거두어 임시 보관했던 자리가 400년이 지난
1890년에 들어서면서 내포 지방에 상륙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인 드비즈 신부는 1895년 5월 6일부터 1931년 7월 5일까지 본당
사목을 하였다. 현재의 성당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성당을 완공했다. 드비즈 신부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 조제로 지금은 고인이 된 유명한 이명래 요한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공세리 본당은 내포 지방 신앙의 못자리이다. 1897년 6월 공주 본당 분할, 1901년 안성 본당 분할, 1948년 온양온천동 본당 분할,
1976년 둔포 본당을 분할시켰다.
본당 구내에 삼위의 순교자를 모신 묘가 자리하고 있다. 1863년 조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밀두리, 걸매포, 해암리 신자 28명이 수원, 서울, 공주 등으로 끌려가서 고문,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하였다. 그런데 박의서, 박익서, 박원서 삼형제의 시신을 신자 한 분이 찾아 본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 모셨다가,
그분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에 따라 1988년 9월 20일 본당 구내로 모셔왔다. "명인치명사적" 제 11권에 기록되어 있기를 1867년 병인
풍파를 당해 삼형제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 말하기를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였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성당과 구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10월 새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갖고 주변 정비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출처 : 공세리 본당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