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만큼, 박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변함없는 대한민국 또한 놀라웠다. 탄핵 이후 일명 진보·개혁 진영 정치인들은 촛불의 전리품을 나눠갖는 데는 부지런했지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개혁은 느렸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아름다웠지만 거기까지였다. 지적·윤리적 우월감을 앞세운 이들은 선거 때마다 ‘열두 척의 배’ ‘죽창가’처럼 민족주의 방망이를 휘둘렀다. ‘내로남불’이라는 손가락질에도 자신들은 괜찮다며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했다. ‘민주’의 정당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수박’이라 불리며 ‘비명횡사’했다.
박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진영의 부활도 놀라웠다. 당시 보수진영은 자신들은 궤멸한다고 했다. 보수진영은 탄핵 정당에 누가 찍어주느냐고 공포에 떨었지만 앓는 소리였다. 탄핵 이후에도 국민의힘은 언제나 2등이었다. 시험을 망치면 꼴찌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선거’라는 시험은 탄핵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도 2등을 보장해준다. 양당제라는 마법 때문이다.
“1년 지나면 국민은 달라진다”고 말한 어느 중진 의원이 체험한 선거 기술은 여의도 정치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래서 보수 정치인은 ‘빨갱이’보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더 무섭다. 계엄 옹호 정당이라 불려도, 민심보다 당심이 먼저다. 그러다 혹시 1등 정당이 국민에게 밉보이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수진영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며 다시 살아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재명이 싫어서 투표를 포기한다’는 말이나, ‘탄핵 다음 대통령은 이재명이다’란 말은 2024년의 말이 아니다. ‘배신자 한동훈’이라는 말이나, ‘한동훈이 아니면 누가 대선에 나설 것인가’란 말도 마찬가지다. 민주(民主)공화국의 시민들은 누구의 선거 운동하러 계엄의 공포를 뚫고 국회로 모인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는 죽어있는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달려나온 것이다. 1987년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를 성찰하고 새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 즉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오늘 우리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는 당파와 이념을 넘어 공동선 증진에 집중해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탁월하다. 지난 7월 유럽 각국 총선에서 극우파의 선전이 예상되던 가운데, 교황은 강론에서 “지금의 민주주의는 건강하지 않다”며 “(피리 부는 사나이가) 당신을 유혹하고 당신이 스스로를 부인하도록 이끈다”고 했다. 동화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누구인지 찾기에 바빴지, 교황의 공동선 증진은 들리지 않았다.
국민을 둘로 가르는 극단의 정치를 물리치자.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가 아닌 상식과 양심의 소리를 내는 정치를 희망하자. 양극단의 목소리만 대표되지 않고 장애인·여성·이주민 등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다원주의를 꿈꾸자. 죽음의 문화가 아닌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정치에 투표하자. ‘땅’이 아닌 ‘땀’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 결국 이 모든 것을 담아낸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자. 1987년 명동성당에서 시민들이 새로운 공화국을 희망했던 것처럼 2024년 시민 저마다의 열망을 모아 새로운 대한민국을 희망해 보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곁에 오신 성탄(聖誕)이다. 탄핵 이후 교회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본다.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어진다. 2024년의 굴곡을 넘어 2025년에는 희망의 문을 열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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