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26일 주한미국대사 하비브는 본국에 전문을 보냈다. “한미관계는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로 시작되는 이 전문에서 한미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사건들을 언급했다. 첫째 1953년 한국 정부가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했을 때, 둘째 1961년의 쿠데타와 1963년 군사정부의 민정 이양 연기, 셋째 1968년 안보 위기 때 박정희 정부의 강경한 대응이 대표적 사례였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한국 정부에 의해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반대였다. 1953년 이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중 핵심은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북한이 아닌 한국이 전쟁 원인을 제공했을 경우 미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였다. 민주주의 질서가 무너지는 데 대한 강력한 반대였다. 5·16쿠데타가 발생하자마자 주한 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쿠데타가 발생한 날 아침 윤보선 대통령을 만난 주한미군 사령관은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올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쿠데타의 성공이 한국의 국제적인 위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한국의 민주적 기관과 자유선거로 수립된 정부는 북쪽 공산주의 전체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가장 큰 재산”이라고 강조했다. 군사정부가 1963년 민정 이양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미국은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했고, 케네디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52년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이 체포됐을 때 미국대사관과 유엔통일부흥위원단은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파병했는데, 막상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민주적 상황에 당황했던 것이다. 미국은 1952년과 1953년 전쟁 중임에도 이승만 대통령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항의는 1971년 12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을 때에도 있었다. 주한 미군사령관은 당시 남북 간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고, 닉슨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왜 비상사태가 선포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이듬해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한미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1980년 계엄 때에도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사형선고에 반대했고, 1987년 군을 동원하고자 하는 한국 정부에 제동을 걸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중지시키려 했던 모든 시도는 우방과의 관계, 그리고 대외 신인도에 매우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 2024년 12월 발생한 사건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공든 탑을 모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계엄 해제와 그 이후 과정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다. 한국 국민들이 지킨 민주주의는 한국과 우방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계속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박태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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