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말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행위들이다. 그런데 듣고 말하기처럼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듣고 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해외여행이나 외국 생활을 해본 사람이 잘 알 것이다. 문득 유학 시절 초반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주인 말을 잘 알아듣는 개를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떠오른다. ‘아, 나도 저 개처럼 프랑스 말을 잘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듣고 말하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워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우리는 아기 때 엄마와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아기는 엄마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가족과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아기에게 말하고 듣기를 가르치는 부모는 얼마나 힘들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해도 당사자인 아기보다는 덜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어려운 것 역시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태어나서 겪는 어려움과 반대의 경우다. 아기 때는 아는 것이 없고 처음이라 배우는 것이 어렵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배우기가 어렵다. 내 안에 들은 것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듣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듣지 못하고 말 더듬는 사람의 치유 이야기가 나온다.(마르 7,31-37) 예수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시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곧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는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겠지만, 동시에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유아 세례 예식」에 나오는 ‘에파타 예식’에서 주례 사제는 세례받는 아기의 귀와 입을 만지며 아기가 귀로 주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한다. 이는 성인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귀로 들으며 새로운 입으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둘 중 더 우선되는 것을 꼽으라면 대부분 듣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만큼 듣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얼 듣는가? 귀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를 듣지만, 우리는 소리만이 아닌 ‘말’도 듣는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 내 귀를 통해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다. 소리는 지나가지만, 말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내 귀로 전달되어 나의 마음에 와 닿게 된다. 진정한 대화란 소리가 아닌 인간다운 말이 서로의 마음으로 오가는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말은 소리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말을 듣는 것도 어렵지만, 무언(無言)의 말로 전해지는 것은 더욱 듣기 어렵다. 가령 병자를 수발하는 사람은 병자가 무언의 언어로 전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필요한 도움을 줄줄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병중에 있는 사람의 말, 외롭거나 의기소침한 사람의 말, 깊은 절망과 상처 속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의 말⋯. 우리의 들음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며, 그들에게 건네는 우리의 ‘말’ 한마디는 그들을 치유하는 힘도 지닌다. 주님께서 그 안에 활동하신다면 말이다.
우리도 청해보면 어떨까. 주님께서 ‘에파타!’ 해주시기를. 미욱한 우리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시기를. 그리하여 주님 음성을 듣고 입으로 주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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