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례명은 베로니카다.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베로니카는 십자가를 진 채 골고타 언덕을 오르던 주님의 얼굴을 닦아준 여인이다. 피와 땀이 닦인 수건엔 그분의 얼굴이 그대로 아로새겨졌다고 한다. 지금 와서 고백하면 이 전승을 알게 된 건 한참 지나서였고, 세례성사 준비하던 중학생 시절엔 단지 이름이 예뻐서 골랐을 뿐이었다. 아녜스가 더 마음에 들었지만, 함께 세례받을 친구가 그 이름을 먼저 고르는 바람에 차선으로 택한 게 베로니카였다.
몇 해 전 사순 시기의 저녁이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 예식에서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얼굴 닦아드리는 장면을 묵상하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과일 냄새가 나는 듯했다. 복숭아와 살구의 달큼하고 싱그러운 내음. 누가 과일 봉투를 들고 성당에 들어온 것일까. 아직 여름 과일이 나올 철은 아닌데. 두리번거리다 재차 마음을 가다듬고 아까의 장면을 떠올리려 하니 이번엔 상상 속의 그분이 피땀 흘리는 대신 “목마르다” 하시는 게 아닌가?
성경에 따르면 그 장면은 한참 뒤,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에 등장해야 했다. 그전에 우선 얼굴을 닦고 두 번 더 넘어지시게 되어 있는데, 왜 주님은 벌써 목이 마르시다는 말인가! 난 당황했다. 목마름은 잠깐 참으시고 우선 피땀부터 닦으시라며 상상 속의 그분께 수건을 들이밀려던 순간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에 뜨겁게 닿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던 온유한 목소리. “그때 네가 준 납작복숭아와 살구를 먹어서 이제 나 목마르지 않다.”
성당 다녀오던 길에 노천 장터 가판에 멈추어 과일을 한 소쿠리 산 적 있었다. 십여 년 전, 박사후연구원으로 프랑스에 일 년간 거주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유학 중이던 친구가 요즘 살구가 제철이라 하길래 평소 즐겨 사 먹던 납작복숭아와 함께 그날은 살구도 좀 골라 담았다. 맘씨 좋은 아랍 상인이 덤으로 자두도 여러 알 종이봉투에 담아주셨다.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었고, 난 목이 말랐다. 어서 돌아가 살구 깨물어 먹어야지 하며 길모퉁이를 도는데, 거리에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분이 그야말로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옆으론 빈 포도주병과 비닐봉지가 뒹굴었고, 장바구니 든 할머니들이 ‘쯧쯧’하는 표정으로 곁을 지나쳤다. 비켜선 채 계속 걷다 문득 그날 미사 중에 들은 “목마르다”가 떠올랐다. 불어에 서툴렀으나 그 부분만큼은 또렷이 알아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따 깨어나면 저분도 목마를 텐데. 곁엔 빈 술병과 상한 음식 담긴 봉지밖에 없을 텐데.
그 무렵 나 역시 장학금이 거의 바닥나 파리지앵이 아닌 ‘파리거지앵’의 처지였으나, 길을 되짚어 걸었다. 덤으로 받은 자두 몇 알만 내 몫으로 원피스 호주머니에 넣고, 과일 든 봉투는 남자분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 뛰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기도하며 “기억해 주실 거죠?” 생색을 내었다. “그럼!” 응답하듯 열어젖힌 창문 밖의 별들이 반짝 윙크했다. “그 복숭아와 살구 바로 내가 먹었다.”
귀에 닿은 뜨거운 숨결이 심장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내 쪽에선 까맣게 잊고 있던 십수 년 전 저 장면을 주님은 여태까지 기억하셨구나 싶었다. 군중을 헤치고 나와 이마의 피땀 닦아준 용감하고 어진 이의 삶 안에 당신 얼굴을 새겨넣어 세기에서 세기에 이르도록 전승되게 해준 분은, 고작 과일 한 봉투 내어놓은 작은 이의 삶 안에도 달큼하고 싱그러운 장면을 여기저기 숨겨놓으셨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게 하라 했는데 복숭아와 살구 이야기를 이렇듯 드러내어 적었으니 난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이미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걱정 안 한다.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과의 비밀을 계속 만들면 되니까. 그분은 미소한 봉헌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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