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브 제작에 사용되는 부품을 설명하고 있는 김현조 대표. 원자재부터 완제품으로 생산되기까지 과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부품마다 고유한 식별 번호가 새겨져 있다
▲ 자동화 설비로 밸브에 사용되는 관에 구명을 내는 공정을 살펴보고 있는 김현조 대표. |
대학 졸업과 함께 국세청에 취직했다. 곧이어 공인회계사가 됐다. 1967년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선망하는 국세청 직원, 공인회계사 개업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직장을 옮겨 투자공사 같은 공기업과 증권사에서 일했다. 한 그룹 방계의 밸브 회사 대표이사까지 지냈다. 하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1982년 독자적으로 밸브 회사를 세웠다. (주)일신밸브의 시작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일신밸브는 품질 면에서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지닌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교회 안에서는 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회장으로 더 잘 알려진 김현조(스테파노, 73, 수원교구 과천본당) 대표이사다.
창업 초기에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국내 유망 중소기업 1호로 선정됐을 정도였다. 잘 나가던 회사는 3년 만에 큰 위기를 만났다. 회사 자체로는 문제가 없었다. 전에 대표이사로 있던 회사의 그룹 전체가 부도 나는 바람에 덩달아 신용 불량자가 된 것이다. 당시 대표이사 명의로 발행한 채권 탓이었다.
“회사와 집이 압류됐지요. 아내는 보험을 해서 생계를 꾸렸고, 저는 채권자들을 만나 사정을 호소하고 기다려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팔면 고철 덩어리밖에 되지 않는 자재 재고를 활용해 남은 몇 명 직원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습니다. 회사는 제 이름으로 운영할 수 없어서 아내 이름으로 바꿨지요.”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출근했고, 직원들이 꺼리는 일을 손수 했다. 손톱 밑이 새까매졌다. 7년을 이렇게 일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30명이 넘었다. 순서를 매겨 돈이 들어오는 대로 갚아나갔고, 더 급한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 돈부터 먼저 해결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당연히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채권자들은 김 대표는 본의 아니게 빚을 지게 됐다는 사정을 알고 기다려줬고, 포항제철 같은 대기업도 거래를 터줬다. 이전부터 김 대표와 알고 지내던 이들이 도움을 준 것이다. 티를 내지 않는 소박함과 겸손함, 그리고 성실과 정직이 그의 자산이었다.
품질 향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주효했다. S-Oil, GS-Caltex 같은 정유 회사들, 현대, 삼성과도 거래를 텄고, 외국 수출도 재개했다. 빚을 갚고 나서도 3년이 지난 1998년 마침내 적색 신용 불량자 딱지가 떨어졌고, 김 대표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회사를 경영할 수 있었다.
“빚을 다 갚고 나니 IMF 구제 금융 사태가 왔습니다. 은행에서는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오고 우리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외국 구매자들의 발길도 줄을 이었습니다. 당시 부천에 있던 회사를 지금의 시흥 시화공단으로 신축 이전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회사가 활기를 띠면서 김 대표가 최우선에 둔 것이 품질 향상과 기술 개발이었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에 사용되는 밸브는 강도나 내구성이 뛰어나야 할 뿐 아니라, 정밀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합니다. 최고의 품질만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봤습니다.”
김 대표는 1999년부터 기술 개발 연구소를 두고 있다. 지금도 전체 직원 110여 명 중 연구 개발 인력이 10%가 넘는다. 회사는 원자력과 석유 화학 같은 설비에 사용되는 각종 밸브뿐 아니라 밸브 제작에 쓰이는 고정밀 핵심 부품을 독자적으로 개발, 회사 신인도를 높이고 있다. 늘 새롭게 나아가는 것, 이것은 또한 기업의 사명이기도 하다. 일신(一新)이라는 회사 이름도 그래서 정했다.
김 대표는 기업이 이재(理財, 돈벌이)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창업 목적을 지향하지만 회사와 근로자는 물론 소비자와 공공 기관, 지역 사회까지 아울러서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2007년, 김 대표는 지역 사회를 위해 ‘제도화된 나눔’을 시작했다. 회사 인근 시흥시 매화동에 지역 결손 가정 자녀들을 위해 연건평 500㎡(약 150평) 규모의 일신매화지역아동센터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하고 있다. 설립 비용을 제외하고도 유지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이 연간 6000~7000만 원에 이른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다. 김 대표가 ‘제도화된 나눔’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나눔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시행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줄어들어 끝이 흐려지고 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화된 나눔 외에도 김 대표는 주변의 불우한 이웃이나 교회를 위한 나눔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빚에 쫓기면서도 형편이 되는 대로 어려운 이웃 특히 청소년을 도왔으며, 본당 총회장을 두 번 지내면서 두 번이나 성당을 신축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 힘을 보탰다.
부산이 고향인 김 대표는 35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까지 아내만 신자였다. “당시 아내가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렸지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살려 달라고….”
아내는 위를 75%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살아났고, 김 대표는 1980년 겨울 서울 방배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는 바로 본당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3년 후에는 성서모임 봉사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참다운 변화는 1985년 성령 쇄신 세미나를 받고 난 이후부터였다.
“저는 성령 세미나를 두 번 받았습니다. 한 번 받고서는 잘 몰라서 다시 받았지요. 그리고 이후에 한 철야 기도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체험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려고만 살아왔다는 것을…. ‘이중 인격자로 잘못 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했지요. 이제는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후 김 대표의 삶은 3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사업, 특히 성령 쇄신 운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본당 기도 모임 봉사자를 시작으로 지구 대표, 교구 임원과 회장, 전국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2012년 말 전국 회장에 선임돼 3년째 봉사하고 있다.
요즘엔 성령 쇄신 운동의 길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김 대표는 기업하는 이들에게 세 가지를 조언했다.
“이재(理材)를 하지 마십시오. 과당경쟁, 뒷거래, 정치력의 유혹에 넘어가면 기업은 끝납니다. 기업가의 정도를 걸으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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