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생활복음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1주일- 하느님 나라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

참 빛 사랑 2022. 8. 20. 14:43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세상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기에 생기는 의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모두가 선호하는 ‘좋은 자리’는 그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참된 행복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좋은 자리는 그 숫자가 정해져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이 열심히 노력해봐야 어차피 이르지 못할 목표라면, 괜한 헛고생 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쉽고 편한 삶을 누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명이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고 그 ‘숫자’를 묻는 말에,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방법’으로 답하십니다. 구원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를 따져가며 이리저리 저울질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진정으로 구원받고 싶다면 하느님 말씀과 계명을 열심히 실천하여 그분 뜻에 보다 충실한 모습으로 살 수 있을지에 신경 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미달될 일도,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가 요행으로 들어갈 일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무한경쟁’ 속으로 내모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유한하고 부족한 세상에서는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의자 뺏기 게임을 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고 충만한 하느님 나라에는 좋은 자리가 충분하기에 남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삶 속에서 열심히 실천하여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그 자격요건입니다. 그 변화란 한 번에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에, 뼈를 깎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통해서 자신을 버리고 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에 ‘좁은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욕심과 집착, 고집과 편견을 다 내려놓는 큰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 문을 통과하고 나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말에서 그들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주님과 맺은 얕은 ‘친분’을 내세우며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입니다. 나는 세례를 받고 미사에도 열심히 나갔으니, 하느님 말씀도 많이 듣고 성체도 여러 번 받아 모셨으니 다른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구원받으리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서울대 총장이랑 친하다고 해서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비난받아야 할 부정이고 바로잡아야 할 불의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하느님에 대해 머리로 아는 ‘종교인’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살아계신 하느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에게서 참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먼 훗날 앉게 될 좋은 자리를 미리 보장받는 게 아니라, 힘들고 험난한 세상 여정을 주님과 함께 걸으며,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고 나의 미래를 그분께 내어 맡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