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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도시들

[성경 속 도시] 키프로스

참 빛 사랑 2016. 10. 25. 22:54

박해 피해 간 섬, 복음의 꽃 피워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제주도의 약 5배 규모다. 섬은 비옥하고 쾌적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다. 또 이곳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비너스 탄생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키프로스는 기원전부터 그리스, 페니키아, 아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아라비아,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878년 영국령이 되었다가 1960년에 비로소 독립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그리스와 터키계 주민의 갈등이 계속돼 남북으로 갈라져 늘 전쟁의 위험 속에 놓여 있다.

키프로스에는 역사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로마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저택과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든 방벽, 바오로 사도가 묶여서 채찍을 맞았다는 돌기둥 등이 있다. 살라미스에도 체육관, 극장, 원형 경기장 등 고대 로마 유적들이 있다.



바오로 사도의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점

성경에서 보면 이곳 키프로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교회를 세웠던 곳이다.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이처럼 키프로스는 스테파노 순교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간 곳 중 하나였다.

키프로스는 바르나바 사도의 고향이며 바오로 사도와 연관이 깊은 지역이다.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이 키프로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사도 13,4).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가 첫 선교 여행지가 된 것은 전혀 모르는 지역보다 잘 아는 지역을 선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 일행은 바로 이 도시의 유다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행이 파포스라는 곳에 가서도 복음을 전했으며 당시 키프로스 총독이었던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유명한 회심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사도 13,7).



라자로 기념 성당 남아있어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선교 여행 때 바르나바가 그의 사촌인 마르코 때문에 바오로가 견해차를 보여 다투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사도 15,39).

마르코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따라(사도 12,25) 제1차 선교 여행을 함께했다. 그러나 마르코는 키프로스까지 동행한 후 그 다음 목적지인 소아시아의 주요 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사도 13,13). 이에 바오로 사도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2차 선교 여행 때 동행하기를 거부하자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 섬으로 가 선교했다(사도 15,37-39). 그러나 제3차 선교 여행 때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감옥에 갇히자 마르코는 그의 곁을 지키며 위로가 돼 주었다(콜로 4,10).

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기적으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후(요한 11,1-27참조) 다른 사람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기적적으로 키프로스에 도착해 키티온과 또는 라마카에서 30년간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는 라자로 기념 성당이 아직 키프로스에 남아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소아시아 전교 여행의 시작지




소아시아 남부의 고대 도시 중 하나인 페르게는 팜필리아 지방의 한 도시로 기원전 12~13세기쯤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게는 트로이 전쟁 이후에 발전했다. 리디아 왕국에 이어 페르시아의 점령하에 들어갔던 페르게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해방되고 최고 번영기를 누린 것은 로마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페르게에서 볼 수 있는 유적 대부분은 역시 로마 때의 것이다. 현재도 유적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페르게는 해안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팜필리아 평원과 서동부의 교통 요충지였다. 현재 페르게에서 발굴된 유적에는 성채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낮은 성읍과 외딴곳에 세워진 기념비 등이 있다. 성벽 안에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욕탕 같은 공공건물이 몇 개 남아 있다. 남문과 서문 밖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극장과 경기장은 성벽으로 쌓인 낮은 성읍 밖에 남아 있다.



바오로 사도, 1차 전교여행 때 두 차례 통과

이곳 페르게는 바오로 사도가 소아시아 전교 여행을 시작했던 중요한 곳이며 그와 연관이 깊은 도시다(사도13,13:14,24-25). 바오로 사도는 1차 전교 여행 때(45~48년쯤) 두 번에 걸쳐 이곳을 통과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페르게에 도착해 곧바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사도 13,14).

이곳 페르게에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넘어가는 곳은 어느 지역보다 위험한 곳이다. 바오로 사도가 강도의 위험을 당했다고 하는 지역이 이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전교 여행에 동행하던 마르코 요한은 너무 힘든 나머지 이곳에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사도 13,13).



바오로와 바르나바, 각자의 길로

이 일은 2차 전교 여행 때 두 사람이 헤어진 원인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중에 세운 교회들에서 문제가 대두하자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보자고 사목방문을 권한다. “며칠 뒤에 바오로가 바르나바에게, ‘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고을로 형제들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15,36).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신앙에 따라 사는지를 살펴보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불리는 요한도 데리고 가려 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마르코가 팜필리아 페르게에서 사도들과 협력하기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결국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로 가서 그들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협조자로 실라스를 선택하여 사도들과 함께 머물며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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