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쉴피스회 피터 그레이 신부 작 ‘In Memoriam meam(나를 기억하라)’. OSV
본당 사목 현장에서 만나게 되었던 다수의 예비신자들께서 처음에는 다양한 계기와 이유로 본인 스스로 신앙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신앙생활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자신의 선택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유다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면서 믿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유다인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2) 여기서 요셉의 아들 예수란 표현은 세속적 견지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빵을 많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유다인들의 수군거림과 불평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으로 그들의 딱한 형편을 지적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물론 그 선물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응답은 인간의 몫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살게 하십니다.(에페 3,17 참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신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이란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전체, 즉 모든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참된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내놓은 것입니다.
사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부인 그 살을 먹는 사람은 그분이 지니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해만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 신비, 신앙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먼저 기적을 보아야만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불치병이 즉시 치유되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면 믿겠다는 식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먼저이고 믿음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기적들을 먼저 체험한 사람들이 나중에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였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다인들 또한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 행적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그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고정된 생각과 완고한 마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믿음이 먼저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빵의 형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빵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믿음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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