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및 글:(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연재 (오늘의 묵상 글)입니다.
2015년1월17일 토요일 복음묵상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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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세상이 말하는 죄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과 동석한 이들을 단죄를 하려고 합니다.
그 율법학자들이란 예수님으로부터 회를 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대상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이든 다양한 법과 규례를 정하고 강제성이나 구속력을 발휘하여 그 구성원들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부딪힐 때 그리스도인은 분명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법은 무엇일까요? 교회가 말하는 하느님의 법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교회에는 두 종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법이라고 신앙공동체가 믿고 있는 자연법(自然法) 혹은 신정법(神定法)이라는 법입니다.
자연법의 내용은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오22,34-40/ 마르코12,28-34 / 루카 10,25-28)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연법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낸 인정법(人定法)이라는 법입니다.
말 그대로 교회가 만든 법이며, 무수한 조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더 이상 큰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어떤 사건들을 만나더라도, 선과 악, 그리고 죄에 대한 식별 기준으로 이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판단이든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법에 합당한 것인가를 신중히 살펴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코 속은 썩어가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 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보통 우리는 남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우리의 나약함이겠지요.
우리는 양심(良心)이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 양심이란 ‘좋은 마음’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든 하느님께 생명을 부여 받을 때, 그분께서 심어놓으신 좋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 양심의 법을 따르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법이
모든 법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은 한 마디로 살리는 법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법이 아니라, 선으로 이끄는 법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죽이는 법이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느님의 법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법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1월15일) 오늘의묵상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히브리서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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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오늘을 삽니다. 어제도 내일도 오늘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늘 오늘을 사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오늘 선택한 구절 첫 부분에 나오는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이라는 표현은 “살아있는 한”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한’이란 말은 오늘이 주어져있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묶여야 할 시간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시간입니다.
미래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기다려야 할 시간이 아니라 확신에 차서 희망해야 할 시간입니다.
따라서 모든 시간의 열쇠는 오늘이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어느 작가의 책 제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시간의 본질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한 함축된 문장입니다.
늘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동시에 그 지금은 늘 과거로 돌려보내야 하고,
동시에 미래는 지금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입니다.
라틴어에서 잘 쓰는 표현 중, ‘지금 여기(Nunc et hic)’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곧추 세우고 오늘의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도 귀중한 시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우리여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시간을 사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행복을 성취하는 길임을 믿습니다.
1월14일 독서묵상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리서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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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유혹에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큰 눈으로 바라볼 때, 모든 인간은 유혹에 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혹인 것이지요.
그러니 타고난 성품이 유혹에 약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 유혹에 약하지만 이겨낸 사람이 있고 이겨내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잘 넘어지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잘 이겨내시는 편인가요?
그냥 모두 잘 넘어지는 편이라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런 우리에게 히브리서는 위로와 용기를 안겨줍니다.
예수님조차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유혹으로서 느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유혹을 끝내 이겨내셨고,
따라서 그 유혹의 강한 힘을 알기에 유혹에 약하디 약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말을 히브리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혹이던지 그 유혹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은 작은 유혹에도 늘 넘어질 수 있는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도와주시겠답니다. 그러니 청하십시오.
다양한 유혹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분명 인생이지요.
유혹의 대상에 대해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욕심이 들어갈 때 유혹이 되고 말 테니까요.
우리와 똑 같은 조건으로 유혹을 이겨내신 그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가 원한다면 함께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붙어볼 싸움입니다.
늘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심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1월13일 연중 제 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코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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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 ‘상관없다’ 혹은 ‘상관하지 마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보통 안 좋은 일에 잘 사용하는 말입니다.
안 좋은 일에 연루되기 싫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중에 나와 상관 없는 일은 없을 듯싶습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도, 내 나라, 내 이웃, 내 친구에게서 일어난 좋고 나쁨을 떠난 그 어떤 일도
넓은 의미로 모두 상관 있는 일입니다.
세상이 너무도 이기적이 되고, 개인주의적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겨울철이 되어 눈이 쏟아지면 골절상을 입는 노인들이 늘어만 간다고 합니다. 집 앞에 쌓이는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지요.
독거노인들의 고독사(孤獨死)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듣게 됩니다.
이 모두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했던 어처구니 없는 민항기 회항사건을 보더라도,
학교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학생의 인권을 짓밟은 돈 많은 여자의 횡포를 보아도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갑(甲)질’이라는 신생어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기사화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발의되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꺼내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어떤 혁신적인 세상의 변화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말입니다.
이것 저것 참견이나 간섭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오지랖이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심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정이나 부조리가 쉽게 일어날 수 없도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지랖 넓게 움직이는 마음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복음적 정신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크게 위배되는 죄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세상의 기쁨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늘나라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일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천국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고통을 당하실 이유는 없었습니다.
상관해야 합니다. 피곤하고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상관해야 합니다. 기쁜 일에는 함께 감동하고 기쁨을 표현해야 하고,
슬픈 일에는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옳지 못한 일에는 옳지 못하다는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서로가 상관 없는 인간 사회는 없습니다.
특히 복음적인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인데 어찌 상관없다 할 수 있겠나요?
나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께 상관하지 말라는 말을 쏟아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 나쁜 영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발악을 하는 모습입니다.
악한 영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로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상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기적 무관심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누군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악의 말에 따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복음적 관심에서 시작되고 발휘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1월11일 묵상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요한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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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위기감을 감지합니다.
자신들은 스승 요한이 조상 때부터 기다리던 메시아이자 그리스도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승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했던 예수님이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이 아닌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분명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 그것도 인생을 걸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요한을 따르고자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포기와 각오 그리고 희망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 밖의 이야기를 스승으로부터 들었고, 거기에다 스승이 증언한 분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적지 않은 마음의 동요가 있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더 나아가 열등감에조차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더 없이 나름의 가치와 소명을 가지고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분명 ‘어떤 길을 걷는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옳지 못한 길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길은 가치가 있는 좋은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 한다 해도, 그 길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좋은 길은 오히려 불행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의 내용, 이른바 삶의 질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질은 복음적인 기준으로 재어야 합니다.
구세사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의 길도 필요했고, 예수님의 길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필요했습니다.
누구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가치를 찾는 것을 넘어 소명의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려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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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못한 길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1월10일 오늘릐 묵상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요한1서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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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과가 절대적인 희망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부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열심히 당신 뜻을 따랐으니, 당신 약속에 대한 희망을 갖고 당신 품으로 돌아간다는 고백이 가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표현일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찬사일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겠지요. 삶을 열심히 산 결과가 죽음을 잘 준비한 결과와 일치하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우리 그렇게 살도록 합시다. 열심히 사랑하면서 열심히 용서하면서 열심히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증명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믿으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한 해, 새로운 오늘, 다시 주어진 기회임을 감사하면서 복음적 실천을 하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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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안 묵상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정신 없이 보낸 연말연시였습니다.
가능하면 매일 묵상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인사 올립니다.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열리어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고맙습니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2015년1월20일 화요일 복음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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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편안 할 안(安), 숨쉴 식(息), 날 일(日)이라는 한자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날이라는 뜻이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좀 서글픈 생각도 드는 말입니다.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 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창세기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창조설화에서 하느님께서 6일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는 이야기에서 그 기원을 찾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창세기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내용이 쓰여졌던 시기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100여 년이 지난 기원전 597년부터 기원전 538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남아있던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의 왕족과 귀족,
대부분의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한 시기입니다. 이를 바빌론 유폐라고 합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된 강제노역에 지친 이들이 고향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자기 반성과 함께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자신들의 신앙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 부분이 창세기의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창세기 설화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는 쉬셨다는 안식일 개념을 집어넣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노역에 시달리는 고달픔으로부터 휴식에 대한 열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안식일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노동이 주는 고단함으로부터 쉬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유폐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종교적 의미로 정립화되었고,
그 영향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도 주일이라는 의미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생긴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뒤따르는 법들이 사람 위에 선다면 그것은 결국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역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이해하고 아름답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주일 미사를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일 미사를 왜 지켜야 하고,
주일 미사를 지키는 이들의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주간의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뒤돌아보고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맞이하라는 뜻입니다.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날, 정말 기분 좋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된 귀하디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안한 숨을 위해서 복음은 오늘도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겼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그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어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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