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명 ‘내란성 증후군’은 언제나 끝이 날까? 주변의 여러 지인은 만날 때마다 전에 없던 불안과 답답함에 하루하루가 예전 같지 않다고 호소한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란 말이 입에 붙어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국민들이 ‘인내의 시간을 거쳐 인고의 시간’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노상원(전 정보사령관) 수첩’의 내용이 발표된 후 많은 국민은 불안과 답답함을 넘어 경악과 공포의 감정 상태를 경험한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곳에서 노상원 수첩 속 끔찍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혹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공포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일부가 실행됐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어 더욱 그렇다.
70여 쪽에 달하는 노상원 수첩에는 500여 명의 ‘수거 대상’(계엄법에 의해 체포돼 구속수사를 받거나 임의로 처단될 인사들을 뜻함)과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계엄 이후 국민적 저항이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장기 집권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실행 계획이 상세히 쓰여있다. 정치·언론·종교·연예계·시민 단체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수거 대상을 지목하고 이들을 체포·수용·살해·군사재판을 통해 ‘수거조치’하려는 계획이 상세히 적혀있다.
군부대를 동원해 국민의 저항을 진압하고, 북한을 끌어들여 정국을 조작하며, 국회의원 수를 절반으로 줄여 의회 권력을 약화하고, 헌법을 개정해 3선까지 혹은 이후까지 장기 집권 계획이 들어있다. 이 실행 계획은 박정희·전두환 이후 45년간 민주적 체제 속에서 (계엄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국민에게는 ‘끔찍한 세상’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노상원 수첩 속에 적힌 실행 계획은 무참한 폭력성과 적개심에서 비롯됐다. 그와 함께 계엄을 모의한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적으로 규정했다. 목록에는 차범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도 들어 있을 만큼 전방위적이다.
그들이 적을 다루는 방식은 강제로 체포해 시설에 수용하고, 체포 후 사살을 위해 폭파와 독살(‘음식물, 급수, 화학약품’ 문구로 짐작),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합의한 법과 질서는 없다. 또 노상원 수첩의 실행계획이 끔찍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반생명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수첩 속 내용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다. 끔찍한 폭력적 방법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훼손해도 상관없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특히 북한을 끌어들여 군사적 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국가 안보를 도구화해 국민 전체를 전쟁에 몰아넣을 수 있는 반생명적 발상이다.
수첩 속의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인 모습은 히틀러와 나치의 유다인 학살을 연상케 한다. 유다인 학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민주주의는 언제든 상황과 조건이 만들어지면 훼손되고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생각의 간극을 폭력이 아니라 합의된 제도를 통해 해결해간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2·3 계엄과 이 계엄의 실행 계획인 노상원 수첩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쉽게 붕괴될 수 있음을, 그래서 경각심과 경계심을 가져야 함을 일깨운다. 계엄이 성공해서 노상원 수첩의 계획이 실행되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가슴 떨리는 일이다.
김인숙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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