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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종] 아르헨티나 이주민 아들로 태어나 교황으로

참 빛 사랑 2025. 4. 28. 14:31
 
 

 
2001년 2월 21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서임된 프란치스코 교황. OSV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적 고뇌와 실존적 질문,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스며있다. 교황의 행보는 단순히 종교 지도자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이주난민·노동자·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야말로 인간 존엄과 공동체 회복을 위해 쉼 없이 걸어온 여정이다.



이주민의 아들, 교황이 되다

“아버지와 조부모는 수많은 이탈리아인처럼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저 역시 오늘날 버림받은 이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 「희망」 중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란 이름으로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훗날 교황이 돼 바티칸을 벗어나 처음 향한 곳이 이탈리아 최남단에 위치한 람페두사섬이다. 람페두사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주민들이 자유와 일자리를 찾아 유럽에 가기 위해 경유하는 곳으로, 낡은 배의 난파 등으로 수만 명의 이주민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교황은 람페두사섬에 도착해 아무 말 없이 십자성호를 긋고 추모 화환을 지중해에 던진 후 해안 인근에서 조그만 보트 위에 제대를 마련하고 야외 미사를 주례했다.

교황은 자서전에서 “이주와 전쟁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대규모 이주민을 만들어 내는 공장은 바로 전쟁”이라고 꼬집었다. 교황은 재임 기간 중 회칙 「찬미받으소서」와 「모든 형제들」, 권고 「복음의 기쁨」 등 수많은 문헌과 메시지로 전쟁과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렸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을 형제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호소했다. 그러면서 평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평화는 가능합니다. 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고 모든 민족의 온전한 발전을 위한 근본 조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린 시절인 1942년 가족 사진.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왼쪽)가 동생 오스카와 함께 첫 영성체를 한 뒤 촬영했다고 한다. OSV

 
프란치스코 교황 신생아 때 모습. 가톨릭출판사

검소하지만 품위 있는 가정

교황은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출신 이민 2세대 아르헨티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황은 이주배경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태어났지만, 가정은 화목했고 평화로웠다.

5남매 중 첫째인 교황은 “평범하지만 품위 있는 가정이었다”며 “품위는 부모가 말하는 방식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가르쳐 준 소중한 가치였다”고 회고했다.

교황의 아버지는 직장 일로 만난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이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교황이 다른 이를 이해하고 삶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며 모든 이를 포용하는 마음은 바로 그때, 가족들이 보여준 모범을 통해 자라나기 시작했다. 2023년 12월 발표된 교황청 교리선언문 「간청하는 믿음」의 핵심이 바로 ‘포용’이다. 교리의 변화나 상대주의가 아닌, 포용의 정신이 문헌의 핵심인 것이다.

어린 시절 교황이 자란 플로레스라는 동네도 늘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이웃들에 대한 믿음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플로레스는 원래 도시에 농작물과 육류를 공급하는 한적한 농촌이었는데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편입되면서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모여들었다. 민족과 종교·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고 직업도 다양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모였지만, 대문을 열고도 잘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이었다.

교황이 즉위 후 수많은 만남을 통해 이웃 종교와 문화에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은 이같은 어린 시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난해 9월에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순방 중 성모 승천 대성당과 이스티클랄 이슬람 사원을 지하로 잇는 ‘우정의 터널’ 앞에서 공동의 가치를 담은 ‘2024 이스티클랄 공동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교황은 선언문에서 “교조주의나 근본주의·극단주의를 경계하고, 종교의 정치적 이용을 막으며, 서로 간 소중한 유대를 더욱 깊이 가꿔나가자”고 강조했다.

“진정한 사회활동이란 차별과 편견의 문화와 맞서 싸우며, 서로 만나고 이해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며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지키고 널리 퍼뜨려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1940년대 말 플로레스의 작은 골목길에서도, 지금 다양한 문화가 활기차게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에서도 이 진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존엄을 지켜주는 노동

1950년 여름, 기숙학교 초등 과정을 막 마칠 무렵, 아버지는 13살의 베르골료에게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교황은 이때를 자신의 어린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열리는 시기라고 했다.

교황은 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세르히오 루빈 기자와의 대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했던 업무가 저를 단련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노동의 고귀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노동과 함께 포상으로서의 여가 문화도 정착돼야 한다”며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건강한 여가와 연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일의 노예가 된다”고도 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 당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익을 내는 것이나 자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람을 위해 일이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 즉위 이후 처음으로 로마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프란치스코 교황. OSV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제 서품 50주념 기념 우표, 우표에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신부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다. OSV
 

사제 성소, 자비의 하느님

1953년 9월 21일. 베르골료는 본당 친구들과 오래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르헨티나에서 9월 21일은 ‘학생의 날’로, 모든 젊은이들이 큰 축제로 여기는 날이다. 하지만 베르골료는 전차를 타기 전, 산호세 성당 근처를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이끄는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매주 미사를 봉헌하던 성당이었는데, 처음 뵙는 신부님이 계셨고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해소에서 나온 베르골료는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그때 사제가 돼야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방어와 저항이 뒤따랐다. 사제 성소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몇 년간은 성장통을 겪으며 고독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교황은 그 시간을 ‘수동적 고독’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고해성사를 했던 9월 21일은 성 마태오 축일이다. 교황은 “예수님이 마태오를 바라보신 순간, 그 자비로운 눈길 속에 이미 선택이 담겨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라며 “훗날 저는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말씀을 주교 모토로, 이어 교황 모토로 삼았다”고 전했다. 또 교황이 되고서도 15~20일마다 고해성사를 받았다. 하느님의 자비가 여전히 인간 위에 머물러 있음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폐상엽 절단, 고통을 대하는 자세 깨달아

고독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 베르골료는 1956년 초, 비야 데보토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곧이어 시련의 순간이 다가왔다. 1957년 8월 신학교에 독감이 창궐했다. 그해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시아 독감이었다. 모두 감염됐고 대부분 4~5일이면 회복했는데, 베르골료는 갈수록 악화했다. 전문의가 흉막에서 1.5리터의 물을 뽑아내기도 했다. 그해 9월 다행히 호전됐다고 판단해 요양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10월 말 폐에 큰 낭종이 3개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오른쪽 폐 상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교황은 폐부전증을 앓았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중 문병 온 수녀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군요”라는 말에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베르골료에게 이제 고통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교황은 “고통은 그 자체로 미덕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방식은 고결한 것이 될 수도 있다”며 “제게 죽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상의 동반자가 됐다”고 했다.



예수회, 공동체로의 여정

요양 기간 베르골료는 공동체 생활·선교 정신·엄격한 수도 규율이 있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선교사로서의 열망과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마을을 통해 ‘함께’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엄격한 수도 규율이 그를 사로잡았다.

1958년 3월 예수회에 입회한 베르골료는 1960년 3월 12일 첫 서원을 했다. 첫 서원 후 곧바로 인문학 과정을 밟기 위해 칠레로 떠났다. 그곳에서 주말이면 가난한 이들이 있는 인근 마을로 봉사를 갔다. 병자를 돌보고 교리도 가르쳤다. 하지만 신발조차 없이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이 모든 경험은 훗날 가난한 이들을 품어 안는 교황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1967년부터는 성 요셉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을 받았다. 곧이어 제3수련기를 보내고, 예수회 양성의 마지막 단계인 영신수련 학교에 들어갔다. 1973년 4월 22일 종신서원을 한 후 3개월 뒤 7월 31일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됐다. 아르헨티나 예수회 역사상 가장 젊은 관구장이 된 것이다. 교황은 30대에 관구장이 된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급하고도 권위적인 결정을 내리는 잘못을 범했다고 고백했다.



침묵의 저항과 군사정권의 그림자

아르헨티나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약 3만 명이 실종되고, 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하거나 사망했다.

군부 시기는 교황이 관구장으로 있던 1973년부터 1979년까지의 기간과도 겹친다. 교황은 당시 막시모 대학교에 거주 중이었는데, 군부에 쫓기던 여러 명을 숨겨줬고, 외국 도피도 도왔다. 납치된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하지만 당시 관구장인 베르골료 신부가 군부독재에 저항하지 않았고, 심지어 군부와 결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5년 콘클라베가 열리기 직전 한 변호사는 베르골료 신부가 1976년 두 사제 납치 사건에 연루됐다고 비난하며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베르골료 신부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2010년 법정 증언을 통해 밝혀진 진상은 베르골료 신부가 오히려 두 사제의 석방을 위해 갖은 애를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두 신부 중 예수회에 다시 입회한 얄릭스 신부는 교황 선출 뒤 이 논란이 불거지자 적극 해명했다. 하지만 교황은 누명이 벗겨졌음에도 부끄러운 허물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검소하고 겸손한 주교·추기경

교황은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돼 플로레스 지역의 주교 대리로 추기경을 보좌했고, 1993년 총대리에 임명됐다. 1997년에는 교구장 승계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돼 이듬해 대교구장에 착좌했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신자 250만 명, 사제 2800명, 남자 수도자 850명, 여자 수도자 2000명, 본당 181개가 있는 큰 교구였다.

하지만 베르골료 대주교는 공관을 사용하는 대신 주교관 2층의 작은 아파트를 집무실 겸 침실로 정했다. 전용 요리사도 없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며 시민들과 편안히 만나 대화했다.

대주교가 됐을 때는 젊은 시절 예수회 관구장 시절의 독단적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격주로 6명의 보좌 주교들과 모임을 열었다. 사제평의회도 1년에 몇 차례씩 열어 토론했다. 모임은 경직되지 않았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되면서는 새 옷을 맞추지 않고, 선종한 콰라시노 추기경이 입던 옷을 수선해 입었다. 추기경 재임 당시 비서실보다 협소한 곳을 관저로 사용했다. 일정도 본인이 직접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수첩에 기록했다. 교황은 선종 후 누군가 자신의 짐을 정리해야 하는 숙제를 남기지 않도록 늘 문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야전병원

2005~2011년에는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다. 2007년 브라질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주교회의 제5차 정기총회 반포 문헌인 ‘아파레시다 문헌’은 훗날 교황의 중심 기조가 된다. 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다.

교황은 2013년 8월 이탈리아 예수회가 발간하는 잡지 ‘라 치빌타 가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상처를 치유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면서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현대 가톨릭 신학의 거장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 신부의 ‘만남의 신학’은 교황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

“만남의 문화란 우리가 베풀 줄도 알아야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함께 걸으며, 때로는 격한 토론을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를 지닌다면, 우리 사이의 차이는 자연스레 녹아듭니다. 다른 이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그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13일. 제266대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결과가 확실해진 후 브라질 타쿠아리 프란치스코회 신학교 출신의 우메스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골료 추기경을 따뜻하게 포옹하며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교황은 “그 말씀이 온몸으로 와 닿았다”며 “바로 그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마음속에 떠올랐다”고 했다. 어린 베르골료의 성장 배경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사목 활동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교황은 추기경 서임 때와 마찬가지로 교황 선출 후에도 누군가 새 반지를 주려했지만, 주교 서품 때의 반지를 꺼내 끼고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벨벳으로 만든 모제타나 리넨으로 된 소백의도 마다했다. 교황은 이후 사람들과 함께 소형 버스를 타고 산타 마르타의 집으로 돌아갔다.

특히 교황 선출 한 달 후에 발표한 추기경 평의회는 매우 특별했다. 평신도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 것이다. 모든 차원에서 이뤄지는 상호 경청의 역동성이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여정이 교황 즉위 후 곧바로 시작됐다. 그리고 2024년 10월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 최종 문서가 나왔다. 교황은 이례적으로 이 문서에 권고를 덧붙이지 않았다. 즉시 실행돼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함께 걸어가면서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성령께 내어 맡긴 것이다.

이렇듯 교황은 권력·사치·교만 등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시선을 옮겼다. 그 힘은 가족에게서 나왔고, 신앙이 기준점이 됐다. 교황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성모님 품에 안기길 희망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바티칸은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집일 뿐 영원한 안식처는 아닙니다. 늘 의지하고 교황 재임 중 100번도 넘게 은총의 품에 안겼던 평화의 모후 곁에 잠들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위한 모든 장례 준비는 끝났습니다. 교황 장례 예식이 너무 성대해서 담당자와 상의해 간소화했습니다. 화려한 장례 제대도, 관을 닫는 특별한 의식도 없애기로 했습니다. 품위는 지키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치르고 싶습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