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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이 왕초’ 40여 년… “봉사하며 제 죽음을 준비하는 거죠”

참 빛 사랑 2024. 11. 15. 13:33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사실 쉽지 않죠. 몇몇 사람만 기억할 뿐이지. 스스로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시거든요.”

40년 넘게 연령회에서 수많은 이를 하느님 곁으로 인도하고 추모하는 일에 봉사하며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인간 삶을 지켜봐온 이병순(미카엘, 85)씨의 말이다.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로서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주요 봉사직을 오랫동안 맡았지만, 자신을 위해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오직 신앙의 기쁨 때문이었다. 11월 위령 성월 중 맞은 평신도 주일(10일)에 삶과 죽음, 봉사의 의미를 들었다.



어머니의 유산, 신앙

그가 평생 신앙 안에서 살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가 있다. 일찍 남편을 여읜 후 6·25전쟁 때 자녀 셋과 생이별하고 나머지 13·11·9살 어린 자녀 셋만 남은 상황에서 본인 장례에 대한 걱정이 컸던 어머니는 신자 지인의 권유로 세례를 받았다. 성당에 다니면 초상까지 다 치러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천주교 묘지를 다녀와서는 “천당이 여기 있다”며 자녀들도 신앙으로 이끌었다. 이씨는 고교 2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어머니 아니었으면 아마 깡패가 됐을지도 몰라요. 그땐 그런 길로 쉽게 빠질 수 있는 환경이었거든요. 어머니 덕에 손주까지 4대가 신앙 안에 바른길을 걷고 있죠.”

어머니는 누가 선종했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재봉틀을 들고 가 수의를 만들어줬다. 봉사와 동시에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74세에 ‘화안(和顔)’의 모습으로 선종했다. 그때 이씨는 연령회원들이 정성스레 봉사하는 걸 처음 봤다. 그리고 연령회에서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30대 후반에 장례미사 사회부터 시작했다. 상조회사가 없던 시절, 염과 화장 등 모든 일을 연령회가 도맡았다. “그 나이에 뭘 알겠어요. 수의 제작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 일념으로 계속했죠.”



김수환 추기경 등 염 맡아

이씨는 연령회가 주관하는 교육에 열심히 참여했고, 「상장예식」의 뿌리가 되는 「성교예규」에 따라 봉사했다. 가난한 이웃의 상장례부터 성직자 염까지 수많은 이가 마지막 순간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김옥균 주교의 염을 담당한 이도 그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 세례받은 지 50여 년 만에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 회장이 됐다. 이씨는 2012년 국가 공인 장례지도사 자격제도 도입 때 교회와 정부의 가교 역할도 했다. 2007년 이미 7개 교구에서 ‘가톨릭 상장례지도사’ 양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교구 대표로 보건복지부와 협의해 가톨릭 상장례지도사들이 교육 시간을 인정받도록 돕고, 고시 절차 없이 국가자격증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람들은 그를 ‘염장이 왕초’라 불렀다.

이씨는 연령회뿐 아니라, 본당 사목회장과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부회장·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위원·성체대회 준비위원·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위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시설본부장 등 굵직한 직책을 두루 맡아 수행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신앙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깊이 알았던 때문인지 입교와 신자 재교육을 위해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았다”고 했다.



누군가 선종 소식 들리면

아내와 함께 지난해 실버타운에 입주한 그는 지금도 미사 때 복사를 서고 누군가 선종하면 달려가 연도를 바친다.

“이제 다리가 성치 않아 잘 걷지 못하는데, 이 나이에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미사 주례하시는 신부님 곁에서 종을 치는 게 그렇게 기쁩니다. 실버타운이라지만, 이곳은 죽음을 준비하는 ‘웨이팅 하우스’입니다. 작년에도 20명 정도 돌아가셨어요. 그중 신자가 4명이었고요. 늘 변함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랬듯 이씨도 다른 이의 장례를 위해 봉사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이씨 부부는 시신과 안구·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모두 기증했기에 저희 부부 장례 때엔 미사만 봉헌하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가 살아온 인생을 아실 테니까요.”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