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은 곧 ‘돈’과 ‘성공’으로 귀결된다. ‘좋음’은 참과 옳음과 아름다움과 무관한 ‘경제’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 가톨릭평화신문DB
동네 거리를 거닐다 보면 여기저기 선명하게 나붙은 ‘임대’라는 커다란 글자를 마주한다. 그런데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서 경기 침체로 인한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장사가 안돼도 임대료는 꼬박꼬박 내야 하므로 결국 월세 낼 돈도 못 버는 자영업자들은 가게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의하면 경기 탓에 임차인이 나타나지 않거나 매물이 팔리지 않아도 건물주는 월세나 매매 가격을 낮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건물주는 경제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재산이 있다는 말일 게다. 한때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건물주’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아이들 눈에 ‘건물주’는 성공한 CEO다. 세입자 자녀 눈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건물주에게 가족이 한 달 내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바친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놀고 먹는’ 성공한 사장으로 보이지 않을까.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출신 배경을 두고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수저 계급론’을 논하면서 첫 번째 성공조건이 부모의 재력이라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우리 속담은 잊힌 옛말이 되어간다. 개천, 아니 도랑에서도 용이 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대사회는 태어날 때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
개천보다 더 좁은 개울이나 도랑에서 미꾸라지처럼 허우적대는 사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유층 이무기는 이미 용이 되기 위해 여의주를 둘러싸고 경쟁에 돌입한 상태다. 이들이 변화무쌍한 산 기운과 굽이치는 강줄기를 타고 바다를 향하는 사이 개천의 미꾸라지는 기적처럼 거대한 도약의 ‘전환점(turning point)’을 마련하지 못하면 경쟁의 기회마저 얻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명문대에 상류층 몰림 현상이 뚜렷하다. 부모의 계층에 의해 자식의 계층이 정해지는 폐쇄적 구조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다.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고등학교 교실 창문을 바라볼 때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첫째 고민은 대부분 ‘성적’과 ‘입시’다. “왜 공부해야 하는데?”라고 물으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은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다시 물으면 여기에 ‘왜’가 왜 필요하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은 곧 ‘돈’과 ‘성공’으로 귀결된다. ‘좋음’은 참과 옳음과 아름다움과 무관한 ‘경제’다. 우리의 교육은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경제적인 부를 얻고 성공할 수 있는지가 목표가 된 것 같다. 인간생활보다 경제생활을 요구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엘리트 반열에 올라야 성공이고 행복이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됐다.
미국 예일대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의 저서 「엘리트 세습」은 ‘실력대로 공정하다는 능력주의는 속임수’라고 주장한다. 경쟁을 강요하지만, 공정하지 않은 거짓 경쟁이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출발선 자체가 다르기에 똑같이 노력해도 치고 올라가는 속도 자체가 다르다. 엘리트 자녀는 이미 넓은 강줄기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사이, 중산층 자녀는 소천이나 실개천에서 미꾸라지처럼 허우적댄다.
‘능력주의’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도록 차단하고 경제적 혜택에서 소외시킨다. 그렇다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유층은 행복할까? 용이 되기 위해 수많은 다른 금수저들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결국 줄 세우는 능력주의는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능력으로 줄 세우는 경쟁사회는 어디에 줄을 서든 불행하다.
엘리트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더 쟁취하기 위해 늘 긴장하고 불안할 것이다. 중산층은 상류층으로 오르지 못한 상실감에 좌절할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불공정을 못 참는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고생한 사람들과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과의 삯’은 분명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능력대로 줄을 세우는 공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줄 세우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꼴찌에 온 사람을 첫째로, 첫째로 온 사람을 꼴찌로 세우는 것’(마태 20,1-16)이 예수님의 ‘공정’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 사회의 폐쇄적 계층구조로 인해 중산층은 계속 밀려나고 부유층은 독주합니다. 부모 재력에 따라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어느 학교에 가느냐에 따라 계급이 나뉩니다. 태생이 금수저인 아이들은 끊임없이 금메달을 따도록 치열한 경쟁에 내몰립니다. 올림픽 대회에 수많은 선수가 나갔지만 ‘금메달리스트’가 되면 더 많은 뉴스 지면을 차지하며 입소문도 타고 보상금액도 다르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경쟁을 강요하면서 ‘공정’을 말합니다.
문제는 능력주의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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