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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금주의 성인] 성 베르나르도 (8월 20일)

참 빛 사랑 2024. 8. 22. 17:01
 
베르나르도 성인. 출처=굿뉴스

‘마지막 교부’로 불리는 베르나르도 성인은 알레타 복녀의 아들입니다. 프랑스 퐁텐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샤티용에 가서 공부하던 그에게는 출셋길이 열려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수도생활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이후 수도자의 길을 밟고자 베르나르도는 1112년 4월 친척·친구 30명과 함께 시토회에 들어갔습니다. 3년 뒤 베르나르도는 아빠스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부르고뉴와 상파뉴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그 수도원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베르나르도는 학덕과 지덕을 활용해 수도원의 외부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어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해 1130년 인노켄티우스 2세 교황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했습니다. 또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1140년부터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해 놀라운 명성을 얻었습니다.

1145년 클레르보 수도원 수도자였던 복자 에우제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 로마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종교적 신비를 항상 목전에 두도록 자세히 전했습니다. 에우제니오 3세 교황은 베르나르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를 랑그도크에 파견해 가톨릭 성사를 거부하는 알비파 이단에 대항하도록 했습니다. 또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도 임명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저술 활동도 왕성하게 펼쳤습니다. 그의 서한과 「아마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설파한 강론은 「아가」로 묶어 펴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이 저술과 설교에 성경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가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으며, ‘꿀처럼 단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해 1170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고, 비오 8세 교황은 1830년 베르나르도를 교회학자로 선포했습니다.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인 그의 문장은 꿀벌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