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후 수필쓰기로 새 삶 열어
꾸준히 문학 작가로 활동하며
누군가의 길잡이 역할도 수행
모든 여정에 하느님 손길 함께해
주님 뜻 따라 여생 글로 살아갈 것
몇 년 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우연히 수필 재능나눔 강의를 듣게 되었다. 퇴직 후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일이 없던 터라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강의실로 향했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과 함께 때로는 경쟁하듯, 한편으로는 동행처럼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다듬으며 조금씩 작가의 언저리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마침내 수필가라는 이름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글과 이름이 실린 문예지를 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건넬 때의 떨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들은 담담했지만 나는 혼자서 온 세상을 얻은 듯 가슴이 벅찼다. 그 기쁨이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첫 수확이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퇴직 후 삼십여 년의 여정이 막막하던 내게 수필은 새로운 소명으로 다가왔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인연이기에 우리의 모임을 ‘명동에세이클럽’이라 불렀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모임인 관계로 여타 문학 동호회와는 다른 끈끈한 형제애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중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코로나19의 유행은 모임을 어렵게 만들었고 명동대성당의 동호회방도 폐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시내 곳곳을 전전하며 공부했고, 수원의 야외 카페까지 찾아가거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등나무 벤치 아래에서도 공부를 이어갔다. 커피와 음료를 챙겨오는 문우들의 정성은 우리 사이를 더욱 뜨겁게 묶었다.
글을 쓰고 발표하며 여러 문학단체에 참가하게 되었고, 뜻밖에도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의 부회장까지 맡게 되었다. 반포천 산책로에서 피천득 선생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인연을 글로 풀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내 글을 읽고 직접 연락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기념사업회 이사가 되었으며, 이제는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우연히 쓴 글을 통해 참으로 놀랍고도 감동을 주는 인연이 아닐까.
한국국보문인협회에서는 꾸준한 활동 끝에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월간지와 신문에 실리는 나의 글들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 나눔과 봉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 사이 여섯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고, ‘한국문학백년상’이라는 큰 상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선물은, 그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뜻 아래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이다.
요즘 나는 반포2동의 ‘느티나무쉼터’에서 수필을 가르친다. 배움의 자리에서 시작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 있다. 연로하신 분들이 많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제자 중에는 이미 등단한 이도 있고, 올해 안에 더 많은 수필가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도 작가가 되리라 생각조차 못 했지만, 하느님 은총 속에 조용히 순응하며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무엇을 하며 살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없다. 지금 한 매체에 격주로 연재하고 있는 ‘조남대의 은퇴일기’라는 제목의 수필은 생각을 품고 컴퓨터 자판을 누를 힘만 있다면 끝까지 쓰며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마지막 사명이라 믿는다. 모든 것이 내 뜻 같았지만, 그 발걸음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 길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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