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6년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한 ‘벙어리 황소’
스승 성 알베르토를 따라 1248년 독일 쾰른으로 떠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약 4년 후인 1252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다. 당시 그리스도교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 파리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바로 ‘세상의 중심’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전하려는 사도적 소명을 꽃피울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1252년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 총장은 알베르토에게 파리대학에서 강의할 유능한 학자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총장의 의도는 알베르토에게 파리대학 교수를 다시 맡아달라는 것이었지만, 알베르토는 기꺼이 제자를 추천한다. 그 제자는 스물일곱 살 정도의 나이로, 파리대학 교수가 되기엔 너무 젊었다. 몸집이 크지만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 그래서 ‘벙어리 황소’란 별명의 그 제자를 보고 알베르토는 학생들에게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그의 목소리를 나중에 온 세상이 듣게 될 것이다”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스승의 혜안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젊은 제자의 재능을 온 세상에 활짝 꽃피우게 만든다. 진리에 관해 토마스 아퀴나스가 삶에서 만난 여러 스승, 물론 그중에는 글로 만난 스승들, 곧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성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가르침이 있으나, 알베르토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열어준 진리를 향한 원대한 길은 토마스의 삶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바로 그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2~1256년 파리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명제집(Libri Quattuor Sententiarum) 강독자로서 강의, 그리고 명제집 주해를 성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1256년 성인은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성인의 사도적 소명은 그리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달갑지 않은 만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탁월한 도구로 ‘토론’ 사용
성인이 1252년 돌아올 무렵, 파리는 이전의 파리가 아니었다. 파리대학에서의 커다란 분쟁, 바로 탁발수도회와 재속 사제들 간 다툼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파리대학의 주요 교수진은 크게 재속 사제 출신과 탁발수도회 출신으로 구분되었다. 두 탁발수도회, 곧 도미니코 수도회·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 교수진과 재속 사제 출신 교수진의 대립은 파리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탁발수도회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번져 나갔다. 갈등과 대립의 원인은 다양했으나, 잔잔한 호수에 빗방울이 내리듯 새로 흘러든 빗방울의 신선함과 기존의 호수와의 급작스러운 만남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새로운 흐름인 탁발수도회와 기존 교계제도와의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교 학문과 문화는 갈등이라는 진통을 겪으면서도 성숙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인은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성인의 교수 취임 강연에서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방해하려 했고, 프랑스 왕의 군대가 경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성인은 굴하지 않았다. 많은 교수가 탁발수도회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설을 내놓았으나, 성인은 조목조목 이를 반박하며 탁발수도회가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진리에 근거해 제시했다. 수도회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들을 반박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라는 성인의 공동체적 정신이 깃든 반박이기도 할 것이다. 성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진리를 탐구하고 전하는 소명,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성인이 파리대학 교수 시절 보여준 강의나 저술 방식은 ‘토론’의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성인은 중세 스콜라 시대 특징인 ‘토론’을 진리를 가르치는 탁월한 도구로 사용한다. 토론 때 우리는 항상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생각, 때로는 나의 의견을 공격하기도 하는 관점을 성인은 면밀히 분석하고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상대방 의견이 나의 의견인 것처럼 소화하고, 토론 참석자들에게 상대방의 견해를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대방 의견과 논지는 명백해지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상대와 진정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최종 목적은 결국 진리다. 진리 자체를 밝히고, 진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성인은 기꺼이 그 ‘대화’를 받아들인다. 그의 ‘토론’ 정신은 저서, 특히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저술 방식 전체에 그대로 드러난다.
수도회 로마 관구 최초의 학원 설립
‘토론’이 지닌 긍정적 가치가 현대 사회에서 많이 상실되었다는 학자들 의견이 많다. ‘대화’를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토론’에서 그저 자기 주장만 펼치고 상대 의견은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토론’ 자체를 포기하고 ‘대화’하려 하지 않는 현대 분위기는 분명 개선돼야 한다. 진리는 단 한 번의 탐구로 드러나지 않는다. 수많은 노력과 수많은 이의 협력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공동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
파리대학 교수를 마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곧 산타 사비나(Santa Sabina)의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수도회 로마 관구 최초의 학원(Studium)을 세우고, 도미니칸 수도자들을 가르칠 소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성인의 위대한 걸작이자 그리스도교 신학의 소중한 보물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 본격 집필되기 시작한다. 그의 사도적 소명이 바로 이 저술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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