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뜻깊은 유아세례가 있던 날, 부모와 아이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천영수 신부 제공
겨울에 오후 2시면 지던 해가
여름엔 밤 11시가 넘어서도 환하게 비춥니다
춥고 긴 어둠의 겨울을 인내해야
길고 긴 여름날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이치를 다시 깨닫습니다
여름엔 밤 11시가 넘어서도 환하게 비춥니다
춥고 긴 어둠의 겨울을 인내해야
길고 긴 여름날을 향유할 수 있다는 이치를 다시 깨닫습니다
어머니 전상서
어머니, 오늘은 날이 맑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알래스카 남쪽 지방은 우림 지대라 비가 많이 옵니다. 그래서 가끔 해가 뜨고 좋은 날씨를 맞으면 사람들은 성당에서 ‘오늘 당신이 이 햇볕을 가져다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맑은 날을 가져다주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 좋은 일들로 남 탓하기 쉬운 세상에 좋은 일이 생기면 남의 덕이라 생각하는 것이 마치 옛날 우리 모습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동네에서 서로 인사도 잘하고 이웃들과 터놓고 지냈지만,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정답게 인사를 주고 받기보다는 인사를 해도 무안할 정도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저는 최대한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하려 합니다. 물론 그 인사가 웃음이 되어 되돌아오면 참으로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제가 선교사로서 예수님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넬 때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이웃 사람들에게 인사를 잘해라”라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인사했는지 학교 선생님이 인사 잘하는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신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 인사 잘하던 학생은 인사 잘하는 신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곳 알래스카는 북쪽에 위치한 덕에 겨울이 길고, 이 시기엔 또 밤이 깁니다. 물론 제가 사는 곳보다 북쪽인 지역은 겨울밤 오로라가 하늘을 수놓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는 곳은 오로라가 시작되는 곳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 그 지역만큼의 아름다운 겨울 밤 하늘을 볼 순 없습니다. 그저 깊고 적막한 겨울 때문에 여름에만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겨울엔 남쪽 지역에서 지내다 오는 일명 ‘철새’로 불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겨울엔 본당 신자들이 줄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겨울에 다른 곳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에 저의 인사를 감사하게 받아주는 사람들과 제가 사랑하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곳 여름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같은 기온으로 하루가 정말 깁니다. 겨울에 오후 2시면 지던 해가 여름엔 밤 11시가 넘어서도 환하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춥고 긴 어둠의 겨울을 인내해야 길고 긴 여름날을 향유할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겨울에 신자들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 신자가 늘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만년설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자연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긴 겨울을 인내했는지 기억합니다.
본당 앞마당에 마련해놓은 작은 부식 창고에서 한 이웃이 먹거리를 조용히 챙기고 있다. 천영수 신부 제공
다른 본당이나 마을을 방문할 때 이용해야 하는 경비행기 앞에서.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보통 기쁠 때는 우리가 힘들었던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슬플 때는 한없이 원망하고 마치 온 세상이 슬픔인 듯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어려움이나 아픔, 이 모든 것을 지나 보내야 알래스카의 어느 길고 아름다운 여름과 같은 날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봅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 아름다운 날 ‘오늘 당신이 이 햇볕을 가져다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사랑을 알리고 전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제가 이곳 알래스카로 발령을 받고 ‘왜 저일까?’ ‘왜 알래스카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지내다 잠시 한국으로 소임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소임을 마치고 예전 선교지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가 아닌 미국의 그저 춥게만 느껴지는 이곳으로 왜 저를 보내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2023년은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 스스로 작은 의미를 부여하여 한국외방선교회의 ‘감사와 보은’의 정신에 따라 100년 전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준 미국 교회에 감사를 전하는 작은 선물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소박하게 이곳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함께하는 작은 선물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물질적 가난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한때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지금은 정신적 가난과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곳 본당 앞마당에는 작은 창고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신자들의 기부로 채워진 부식들이 가득합니다. 성당에 앉아 기도하거나 사제관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창 밖을 내다보면 오늘도 작은 부식 창고에서 누가 볼까 눈치 보며 캔 몇 개와 부식을 챙겨가는 이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이 저를 보게 되면 혹시나 부끄러워할까 얼른 자리를 피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러한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고민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기 위한 방법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이곳에 2000년 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100년 전 그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머나먼 한국 땅에 오셨던 선교사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제가 이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여기는 우편이 집까지 배달되지 않는 곳이라 오늘은 우체국에 가서 사서함을 확인해야 합니다. 가는 김에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마트에도 들러 장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웃으며 인사를 전할지 궁리해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잘하겠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인사를 잘 전해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작은 선물과 기쁨이 되기를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 인사드릴 수 있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럼 건강 잘 챙기시고 또 기쁜 마음으로 뵙는 날까지 저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아들 한국외방선교회 천영수 마론 신부 올림
천영수 마론 신부 / 알래스카 앵커리지-주노대교구 바다의 성요한 성당
후원 문의 : 02-3673-2525(미주 : 310-922-1502)
후원 계좌 우리은행 : 1005-301-587887, 재단법인 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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