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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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신부의 철학 일기] ‘나’를 넘어 ‘너’에게로

참 빛 사랑 2025. 1. 26. 13:14
 

해마다 1월이면 각 교구와 수도회 별로 사제·부제 서품식이 열립니다. 저도 전국 이곳저곳을 누비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교구 신학생들과 제가 속한 수도회인 작은형제회 형제의 서품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10년 남짓의 쉽지 않은 양성을 마치고 찬란한 젊음을 발산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으로 타인을 위한 삶을 공적으로 다짐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 세상, 그래도 아직은 참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묻고 싶어집니다. 이들이 다짐하는 이타적인 삶이 과연 가능한가? 정치인들의 “이 한 몸 나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라는 외침의 진정성을 믿느냐 하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고요. 정말 남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고 그렇게 존경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도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위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나에게 매력적인 이를 사랑하는 것이지, 나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는 이(나에게 아무런 이득을 줄 수 없는 이)를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사상가들은 대체로 선행의 동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함이고, 남을 향한 사랑도 그 뿌리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남을 돕는 선행과 사랑을 통해 우리는 덕을 갖추게 되고, 행복은 곧 덕스러움이기에 남을 위한 선행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입니다. 악행은 우리 영혼에 해롭고요.

하지만 이러한 고대의 사고방식은 성경을 만나 서서히 수정, 발전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를 위한 온전한 사랑을 ‘향유’라고 정의하면서, 대상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예 : 나)를 위한 사랑인 ‘이용’과 구분했습니다. 성인께서 현대인들에게 ‘향유’ 개념을 직접 가르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는, 너를 위해 너를 ‘향유’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너를 ‘이용’하지 않는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인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이 ‘향유’로서의 사랑 개념을 발전시켜 진정한 사랑에는 그 대상 자체가 목적인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의 사랑이고 또 하나는 자유의 사랑입니다. 그 누군가 나의 본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에 그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자연의 사랑이고, 나의 욕구와 무관하게 그를 목적으로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자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들과는 달리 자유의 사랑을 하는 존재인데, 우리는 사랑한다면 매력적인 대상이라도 본성적으로 끌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선택하기에 사랑하는 것이고, 매력이 없는 대상이라도 사랑하기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력적이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죄에 물들어 있음에도 사랑하신 것이라고. “영희야, 난 네가 그냥 너라서 사랑해.” 이런 철수의 이유 없는 사랑이 진짜죠. 맞죠.

성직에 자신의 삶을 거는 이들의 첫 출발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진정한 ‘향유’의 사랑을 향한 자기 극복의 도약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직의 은총에도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 전적으로 이타적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이기적인 욕구가 주는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서품식에서, 또 그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들이 쏟는 눈물과 그들을 바라보며 뜨거워진 우리의 가슴은 그 영원한 의미를 잃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는 우리의 ‘나’를 향한 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영원한 ‘너’를 향한 지향에 의해 드높여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