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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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내란과 희년(박상훈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참 빛 사랑 2025. 1. 18. 11:45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12·3 내란이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채 우리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국민을 살해할 수 있는 폭력과 테러는 물론 전쟁까지 도발해 독재를 준비한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내란을 정당화하고 법치를 떠드는 지경이 됐다. 국무위원들과 여당을 포함해 국가기관 엘리트들, 극우 사회종교 기득권층과 단체들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내란 범죄를 옹호하며 돕고 있다. 이 내란은 윤석열 대통령의 단독 범죄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깊게 퍼져 있는 광기와 허위·악의 공모다.

지난달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문(聖門)을 두드리며 2025년 희년의 개막을 알렸다. 이때 봉독한 복음이 요한 복음의 ‘목자의 비유’였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10,1-2) 세상을 절망과 비참으로 몰아가는 이 시대의 ‘도둑과 강도’들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암담하기만 하다. 내란으로 일상의 삶이 뒤흔들리고 어렵게 가꿔온 민주주의는 붕괴 직전인데, 우리는 어떻게 희년을 기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희년은 땅을 쉬게 해서 해방시키고 용서하며, 정의를 추구하며, 하느님의 해방 시간을 기뻐하는 때이다. 땅을 쉬게 한다는 것은 땅, 곧 세상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독자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이다. 땅은 탐욕과 폭압에 의해 착취되거나 소진될 수 없는 고유한 생명이다. 나아가 땅이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살고 먹으며 땅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바로 희년의 땅이다.

희년에는 땅에서 용서로 도약하는 큰 전환이 있다. 희년의 용서는 죄의 용서를 포함해 빚을 탕감받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가책이든 어찌할 수 없어 빌린 사채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풀려나는 것만큼 큰 해방은 없다. 우리는 이 모든 빚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오랫동안 ‘하느님 나라’ 프로젝트를 추구해왔다. 인간 존엄은 말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라는 것, 땅·집·일의 권리는 기본권이라는 것, 폭정과 독재는 균형과 복리를 추구하는 사회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자유란 사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선택하는 가치라는 것, 이 모두가 이 프로젝트의 실천방식이다.

공동선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요구에서 나오는 필요와 관심사다. 좋은 사회란 ‘공동’으로 생각하는 ‘선’을 일상 삶의 기술로 단련하는 사회다. 신학자 장 다니엘루 신부는 “정치는 공동선, 즉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온전하게 성취할 수 있는 질서를 창조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할 자유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내란의 와중에 우리가 새삼 확인한 것은 지금의 기득권층은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평생 생각해 본 적 없고, 오직 사적 이익과 욕망이 삶의 기준인 이들에게 맡길 수 있는 세상이란 없다. 욕망과 폭압의 질주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는 시간이 희년이다.

희년을 사는 것은 ‘더 큰 것’을 향해 가는 희망의 행위이며, 선함과 거룩함이 존재한다는 확신의 행위이다. 지금은 부서져 있지만, 안식일의 고요함이 있다. 형제를 살해했지만, 용서가 있다. 막대한 불평등이 있지만, 예언적 정의가 있다. 죽음이 있지만, 새 세상은 태어난다. 그러니 내란의 밤도 죽음처럼 저물 것이다. 한남동 거리,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최승호 시인) 아래 밤새 눈을 맞으며 꿈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우리’가 모여 ‘세상의 치유(티쿤 올람)’에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