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산탄젤로 요새에 굳건히 서 있는 성 바오로 사도 성상. OSV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처럼 사도들이 이끌던 초대 교회 때부터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벌어진 골이 점차 깊어 갔습니다. 특히 거짓 설교자들과 교리교사들, 영지주의자들, 지나친 금욕주의자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완전히 갈라 세우듯 자기주장만 해댔습니다.
만일 인간 예수가 복음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그분, 사도들과 교회가 복음서에 기반을 두고 선포하는 그 예수와 다르다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믿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앙, 곧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믿음은 바로 이 땅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성경적 믿음을 위해 다른 것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상징적 암호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근거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실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우리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베네딕토 16세 교황, 「나자렛 예수 1」 13쪽)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후 부활하신 역사의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20여 년 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놀라운 그리스도 찬가를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그리스도교 탄생 이후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런 그리스도론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하느님의 신비’에서만, 곧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이해 가능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교 믿음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공적 계시는 ‘성경’ 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읽어나가면 그 안의 모든 말씀과 글에서 주님의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하려는 자들과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에 빠뜨려 분열시키려 한 자들에 대해 사도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0-12)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세상의 유일한 참된 주님이신 분과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하느님의 무기’를 선물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무장을 갖추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든 지체와 함께 일치와 친교를 나누면서 악의 권세들에 대항합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의 권세를 물리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열두 제자들에게 악마를 추방하라는 임무와 치유의 사명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태 10,1 참조) 이는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사명이기도 합니다. 악마를 몰아내고 인간을 치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가르침에 대항해 ‘의롭게’ 살았습니다. 이 의로움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생겨납니다. 의로움은 구원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1코린 6,11)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4-26)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율법의 유다인보다 복음의 그리스도인으로 더 의롭게 됐고, 철학의 그리스인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됐음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총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거저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은총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애와 공정, 의로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의로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성화의 길로 나아갑니다.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이 지금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토마스 할리크, 「그리스도교의 오후」 196쪽)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영성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보다 성화 복원할 때 가톨릭 신자로서 더 큰 보람 (0) | 2024.12.27 |
---|---|
[사도직 현장에서] 그래도, 나라도, 뭐라도 (0) | 2024.12.20 |
‘괜찮다’ 말씀해주시는 하느님 (0) | 2024.12.17 |
미술품 복원가들의 적절한 처치, 진품이 복사본으로 의심받기도 (0) | 2024.12.17 |
기다림, 주님 모실 수 있는 마음속 ‘빈방’ 준비하는 시간 (0) | 2024.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