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여 년 이어온 신앙의 못자리
초지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천교구 온수본당 초지공소가 있다. 6ㆍ25 전쟁 휴전 후 초대 강화본당 주임인 장금구 신부가 강화도 선교를 자원했다. “강화도 온수리란 곳에 차를 내려 신자들이 있는가 찾아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옹기 굽는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그곳에 가 보았다. 신자 170여 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으나 다른 곳엔 교우가 없고 강화읍 대산리에 몇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구 10만이 넘는 강화군에 성공회당이 3개요, 개신교 예배당이 무려 60여 개가 있으나 성당은 공소만 둘, 그것도 인천본당에 속해 있어서 1년에 한두 번 신부가 다녀갈 뿐이었다.”(「강화성당 이야기」 54쪽, 장금구 신부 회고록 중에서) 장 신부의 말처럼 1928년 충남 서산군 팔봉면에 살던 양촌명을 비롯한 교우 9명이 온수리로 이주해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이들의 전교로 온수리에는 신자들이 점차 늘어갔다.
초지공소는 1958년 강화도 첫 본당인 강화본당이 세워진 이후 그다음 해인 1959년 설립한 유서 깊은 공소이다. 신자들은 초대 이왈용(베드로) 공소 회장의 사택을 임시 공소로 정해 공소 예절을 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그러다 1961년 인천대목구가 설정되자 강화본당은 서울대목구에서 인천대목구로 관할이 이관됐다. 이때 당시 강화본당 보좌였던 메리놀외방선교회 패트릭 파터슨 신부가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804-1번지에 대지 681㎡를 매입해 80.7㎡ 규모의 한옥 공소를 지어 1961년 11월 14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제3대 강화본당 주임이 된 파터슨 신부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운영하면서 지역 개발과 청년 교육에 힘썼다. 이때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입교했고, 초지공소 신자 수가 40가구 120여 명으로 늘었다. 1997년에는 공소 건물을 오늘의 모습으로 보수했다.
너른 들판에 ‘ㄷ’자 형태의 조그마한 한옥으로 꾸며진 초지공소는 정겹다. 천장과 벽에는 나무 보와 기둥이 얼기설기 노출돼 있고 깨끗하게 회칠이 되어 있다. 성체를 모신 감실은 물론 제대와 신자석, 십자가와 수호성인인 요셉 성인상, 성모상, 제의를 보관하는 옷장 등 빠짐없이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초지공소는 매월 2ㆍ4째 주일 오전 8시에 주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공소 신자 대부분은 80대이지만 공소 내부에 티끌 하나 없을 만큼 자부심을 품고 공소를 가꾸고 있다.
김태형(요셉) 회장은 “요즘엔 차가 있어 주일이면 본당 미사에 참여하는 교우들이 많지만, 농사일을 하다가도 공소에 들려 기도하는 교우들이 아직도 많다”며 “감실에 모셔진 성체를 함께 조배하고 교우들과 정담을 나누며 공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수줍게 웃었다.
문의 : 032-937-1386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