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소망 담은 초상화 남기고
4·19 혁명이 일어났다. 장발은 ‘미대 권력’으로 찍혀 퇴진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미술대학 운영에서의 권위 의식과 카리스마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학생 혁명 전에 이미 장발은 이탈리아 특명전권대사로 내정되어 현지 발령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안타깝게도 중단되었다. 장면 총리가 실각하자 장발은 한국 화단에서 공식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인트 빈센트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며 지내다가 다시 붓을 잡고는 성화와 추상화를 그렸다. 그때 그린 자화상 한 점이 전해진다. 그 작품은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다. 줄 처진 셔츠를 입었다. 자세는 측면이다. 그런데 고개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깨끗이 빗어넘긴 머리에는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인다. 굵은 뿔테 안경테 밑으로 보이는 둥근 눈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른쪽엔 호랑나비 한 마리가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나비는 부활을 상징한다. 미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싶은 소망을 담은 것 같다.
장발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보낸 곳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라는 도시였다. 장발의 제자인 최종태 요셉(서울대 명예교수)이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은 아흔다섯의 나이였다. 최 교수는 방문하기 전에 궁금한 것을 정리해 가져갔다. 김대건 신부와 명동성당 14사도 그림을 그릴 때, ‘성미술전람회’ 때, 혜화동성당을 만들 때의 일화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귀가 어두워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 뉴욕 맨하탄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는 셋째 아들 장흔 신부가 와 있었다. 장 신부에게 메모를 전달하고 대신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집에는 그림 여러 점이 걸려 있었다. 그중에 삼위일체의 성부·성자·성령이 한복에 도포를 입고 갓 쓴 그림이 있었다. 최종태는 그런 형식의 그림은 처음 보았다. 그림 속에는 김효임 골룸바와 김효주 아녜스가 있었는데, 멀리 봄 안개 너머로 남대문이 보이고 성녀가 가는 길가에는 꽃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또한, 성모 승천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상도 있었다. 머리 위에는 화환이 얹혀 있고 손에는 백합이 들려 있다. 예전에 그렸던 성화를 다시 새로운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게 평생토록 가톨릭 성화를 그린 장발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애를 마쳤다. 장발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진정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다.
참고자료 : ▲가톨릭평화신문. ‘장발 화백의 미공개 ‘김대건 신부 초상화‘, 수원교구에 기증.’ 2022.7.17.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상)’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8.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중)’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15. ▲가톨릭신문. ‘장발 화백(하)’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2016.5.22. ▲가톨릭신문. ‘한국 화단의 거장 우석 장발 선생’. 특별초대석. 1997.1.12. ▲경인일보. ‘서양화가 장발’(인천인물 100인). 2005.10.20.▲정영목. ‘장발평전(1946-1953)-https://s-space.snu.ac.kr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