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 역사·시대적 배경<2>
▲ 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린 프레스코 작품.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소장.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전쟁에 나가던 도중 집으로 도망쳐 온 꼴이 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의 이상은 산산이 부수어졌고, 그의 미래는 흐릿해졌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난감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려고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자신의 포목 가게를 도와 일을 하게 하면서 돈 버는 일에 집중하게 하였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는 프란치스코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게 해줄 손쉬운 방법이었을지는 몰라도, 프란치스코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답답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장사에 집중하기보다는 가게 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자기 성찰의 삶 중에 나환우를 만나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첫 번째 전쟁에 나가기 전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삶을 택할 수도 있었다. 사실 첫 번째 전쟁 참전 전의 그의 삶은 자유분방하고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호화롭게 연회를 열며 보낸 날이 많았는데, 매번 그의 친구들은 그를 그들 축제의 왕으로 추대하곤 하였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즐기다가 아시시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쏘다니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러 나가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프란치스코는 이런 야단스러운 축제와 친구들과 어울림이 지겨워지기도 했고, 삶의 의미가 무언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시시 변두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초기 전기작가들은 ‘회개’의 시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시기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1204년 말부터 1206년 1월까지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일종의 자기 성찰을 위한 집중 시기였다.
프란치스코는 한 이름 모를 친구와 함께 한적한 장소에 가기도 했고, 혼자서 동굴에 들어가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갔을 땐, 그는 완전히 멍한 모습이 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때로는 아시시 밑에 있는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가곤 하였는데, 거기에는 나환우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이렇게 아시시 아래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갔다가 어느 나환우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실제로 여러 전기가 전하는 바로는 프란치스코는 나환우를 무척이나 싫어하였다고 한다. 초기 전기 작가들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얼마나 꺼리었던지 거의 2마일 밖에서도 나환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때에도 그는 비록 그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에 의해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는 말에서 내려와 그 사람에게로 가서 돈을 쥐여주고는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틀어서 이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하였는데,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 기억을 떠올릴 정도였다.(유언 첫머리)
쓰러져가는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 매료
1205년 말에 가서는 또 다른 만남이 그를 전적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 만남은 아시시 아래쪽에 있는 쓰러져가던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 다미아노 성당은 한 가난하고 늙은 사제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사제는 너무 가난해서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십자가(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 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도 없을 정도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 매료되었다. 이 십자가는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성 클라라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천사들과 성인들이 둘러싸여 부활하시는 모습이 훨씬 더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눈은 크게 뜨여 있고, 비록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는 있지만, 그는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십자가가 바로 프란치스코에게 말을 건넨 십자가이다.
아버지의 포목과 말 팔아 헌금 마련
전기 작가들은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그 오래된 교회를 “나의 교회”라고 하면서 프란치스코에게 그 교회를 수리하라는 부탁을 했다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젊은 사람의 예리한 눈에 쓰러져가던 그 성당이 긴급한 보수가 필요하다고 보였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의 보수를 위해 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포목을 꺼내 가지고는 폴리뇨의 시장에서 가서 그 포목을 죄다 팔았고 말까지도 팔아버렸다. 그는 여기서 번 돈을 들고 열정에 넘쳐 돌아와 그 성당의 사제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사제는 피에트로가 자기 아들이 근간에 저지른 이런 기이한 행동에 대해 개입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헌금을 신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헌금을 받는 대신 그 사제는 프란치스코의 열정을 진심으로 여겨 프란치스코에게 자신의 조력자인 ‘봉헌자’(oblate)로서 자신과 함께 참회의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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