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구원이 약속된 곳으로 건너가는 순례길이다. 기다림을 통해 더 나은 신앙인으로 변화하면서 희망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OSV
“우리 갈까?” “기다릴까?”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올 것만 같은데, 오지 않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의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실낱같은 희망을 놓을 수가 없다. ‘기다릴까?’ ‘갈까?’ ‘그래도 오면 어쩌지’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두 남자는 쓸데없는 말을 한없이 늘어놓으면서 마치 기다리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며 절망과 혼돈의 끝자락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그런데 ‘고도’라는 대상이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기다림의 행위 자체가 최종 목적인 듯 그래서 더 부조리하고 허무하게 다가오는 작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무의미한 기다림만으로 나열되면서 불확실성과 비논리만으로 가득 채운, 이 이야기에서 역설적이게도 ‘진짜 기다림’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고 또 묻게 된다. ‘도대체 고도란 누구인가?’ ‘왜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가?’ ‘고도는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고도는 희망이고 구원일까?’ ‘실체 없는 고도를 기다리다 시간만 허망하게 흘러가는 것일까?’ 어쩌면 이러한 무의미한 반복과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고통 안에서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인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빠르고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대림 시기가 되면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 그러다 성탄절에 기뻐하고 즐기다 어느 순간 또 사순과 주님 부활 시기를 맞이한다. 매해 바뀌는 전례의 시기가 반복되면서 연례행사처럼 맞이하고 습관이 되어 반복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익숙함과 편안함은 아무런 자극이나 고민 없이 루틴이 되고 일상이 된다. 어쩌면 나 역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사이에 서서 ‘기다릴까?’ ‘갈까’를 반복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부조리한 시간 속에서 때론 불안하게 허우적대고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리면서 말이다.
12월, 세밑에 서면 문득 고독과 우울한 느낌이 들고 공허하고 외로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 마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기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막연히 그 무언가를 기다린다. 정호승은 ‘기다리는 마음’이란 시에서 “기다림 때문에 눈이 내리게 하고 기다림 때문에 꽃이 피고, 새벽이 오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겨울이니 눈이 오고 봄이니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기다렸기 때문에, 그것도 간절하게 기도하고 희망하면서 기다렸기에 눈도 오고 꽃도 피면서 기다리던 님도 오신다. ‘기다림’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면서 한 공간에 머물러 멈춰있는 것이 아닐 거다. 기다림은 무의미함의 반복이 아니다. 기다리면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생명이 꿈틀대며 꽃을 피운다.
우리의 기다림이 습관적으로 무의미한 반복이 되어선 안 될 것 같다. 기다림은 내가 누구인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사색과 탐구의 여정이다. 때로는 기다리면서 언제 올 것인지, 정말 오기나 하는 것인지 불확실함으로 조금은 긴장하면서 불안한 상태에 머물 수도 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결핍이 루틴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고 오히려 내면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다림은 구원이 약속된 곳으로 건너가는 순례길이다. 기다림은 구원을 향한 간절한 믿음으로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마음준비를 하게 한다. 기다림을 통해 더 나은 신앙인으로 변화하면서 희망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누군가는 기다리다가 부패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발효될 수도 있다. 변질 차원에서는 같지만 부패는 죽음으로 몰고 가고, 발효는 유익한 물질로 변화하는 생명현상이다. 그러기에 내 안의 어둠이 죽어 새 생명을 낳는 고통의 시간을 버텨내야 한다.
기다림은 예수님이 그 어딘가에 태어나고, 구원은 그 언젠가 이루어지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바로 내 마음에서 탄생되고 바로 지금 여기에 구원이 오리라는 확신이다.
<영성이 묻는 안부>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은 쓸데없는 말로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고도’는 더이상 중요해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기다리긴 하지만’ ‘누구’를 ‘왜’ 기다리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기만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은 정서적 피로와 혼란을 겪으면서 내적 성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갈까’ ‘기다릴까’를 반복합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사실상 끝없는 반복과 습관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때론 무력감에 빠지고 공허하고 우울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은 단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어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기다림으로 인해 기쁘게 행복과 희망의 문이 열리도록 내 마음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마음속 ‘빈방’을 마련해야겠지요. 마음속 욕심과 미움과 질투의 공간을 비우고 또 비워서 아기 예수님이 내 마음에 태어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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