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자 행적 번역하며 슬픔 달래
1844년 3월 15일 중국 요동에 도착해 만주대목구 선교사로 활동한 베르뇌 신부는 1848년 이전까지 양관과 개주, 심양 아래에 있는 요양 사령(현 요녕성 요양시 태자하구 사령진)에서 사목했다. 따라서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1846년 3월 이후부터 12월까지 이 세 곳 가운데 한 곳에서 생활했다. 베르뇌 신부의 편지 발신지를 보면, 1844년부터 1848년까지는 주로 양관과 개주로, 1849년 2월 21일 자는 요양으로, 1849년 10월 15일과 20일 자는 차쿠로 나온다. 하지만 최양업 부제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압록강 변문으로 떠나기에 앞서 1846년 12월 22일 스승이며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의 발신지가 ‘심양’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거처를 지정하기가 어렵다.
최양업 부제는 이 편지에서 조선 입국에 대한 그의 기대와 설렘을 밝힌다. “우리가 무사히 조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전한다면 이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실 신부님의 기쁨에 못지 않게 저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기뻐 용약하는 마음으로 더 자유롭고 더 자세하게 신부님께 서한을 올리겠습니다.…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압록강 변문에서 자신들을 데리러 온 조선 교우들을 만났다. 조선 교우들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에게 병오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을 전했다. 그러면서 삼엄한 경비로 조선에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최양업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조선에 들어갈 수 없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고, 친구가 순교했다는 비통한 소식에 경악한 최양업 부제는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다”고 슬퍼했다.(최양업 신부가 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조선인 교우들에게서 페레올 주교가 쓴 편지를 전해 받았다. 그 편지 안에는 프랑스어로 기록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1846년에 순교한 9명의 약전」이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자신에게 쓴 편지도 받았다. 그 편지에는 “마카오 대표부로 가서 조선 원정을 계획하고 있는 프랑스 군함에 승선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홍콩으로 갔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1847년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최양업 부제는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행적으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부모와 동료를 잃은 슬픔을 달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